집권하고 싶은가? 한국 사회의 얼개를 그림으로 그려보라!

집권하고 싶은가? 한국 사회의 얼개를 그림으로 그려보라!

 

                                                      김대호(사회디자인연구소장) 

 

 

지난 10여 년의 내 중심적 화두가 국가경영 내지 진보 혁신이었다면, 지난 몇 개월의 내 중심적 화두는 서울시정이었다. 서울, 경기 등 지자체 경영이라고도 할 수도 있다. 아마 앞으로 한 동안은 그럴 것이다. 실은 연구소 차원에서는 작년 연말쯤부터 서울시 경영을 중심적 화두로 삼기로 되어 있었으나 몰입이 되지 않았다. 특히 올 상반기에 참여정부 평가 작업,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와 <노무현 이후> 집필 작업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시정을 연구하면서 수많은 책과 자료를 들춰보았다. 서점에 나와있는 도시 관련 책과 서울시정개발연구원에서 생산된 방대한 보고서를 들춰 보면서 질리기도 했다. 수많은 연구자, 공무원, 서울 시민의 경험, 지식, 지혜를 결집하여 기획, 실행한 이명박-오세훈의 시정 성과를 뜯어보면서도 질리기도 했다. 이명박 정부의 국정이야 그 철학, 가치, 비전의 특이함으로 인해, 또 권능이 큰 만큼 정책적 선택지(큰 그림)도 많아서 비판하기도 쉽고, 차별화된 진보적 대안을 제시하기도 쉽다. 그런데 서울 시정은 원래 그 누가 하더라도 정책적 선택지가 많지 않고, 또 오시장도 그렇게 독단적이지도, 무리수를 구사하지도, 게으르지도, 부정하지도 않아서 비판도 차별화된 대안 제시도 쉽지가 않다. 혹시 대심도 지하차도를 밀어붙인다거나 용산에 5천 톤 급 관광선을 들어오게 하여 황해를 건너겠다면 몰라도……물론 시민 다수가 공감하기 힘든 환경.생태적 가치를 최상위에 올려 서울시정을 재단한다면 비판과 대안 도출은 쉬울지 몰라도 서울시정을 접수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서울 시민의 요구, 기대, 불만, 고통을 찬찬히 뜯어보면 오세훈 시정의 심각한 문제가 적지 않다. 진보적 대안 역시 그리 빈약할 것 같지도 않다. 이는 서울의 (곁가지 문제가 아닌) 핵심 문제를 짚어야 도출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서울 시정에 대한 나의 비판과 대안은 충분히 숙성, 검증되면 조금씩 공유할까 한다.

 

우선 서울시와 서울시정을 연구하면서 느낀 점 한 조각만 공유할까 한다. 이는 문제의 핵심을 짚는 일의 중요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너무나 거대하고 복잡다단한 한국 사회와 서울시를 연구하면서 절감한 일이다.

 

<도시 읽는 CEO>

서울시를 연구하면서 읽은 꽤 많은 책 중에서 특별히 인상 깊은 책의 하나가 김진애 의원이 쓴 <도시 읽는 CEO>(21세기북스)라는 책이다.

 

내가 아는 한 김진애 의원(헌재판결에 힘입어 얼마 전 민주당 비례대표 의원이 되었다)은 서울, 특히 서울 공간디자인에 관한 한 대가다. 서울과 도시계획에 관한 한, 또 인문학적 통찰에 관한 한 그 폭과 깊이를 견줄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다. 김의원은 서울대 건축학과를 나와 1988년 미국MIT에서 도시계획학 박사를 받았다. 산본 신도시, 인사동 길 등을 설계했고, ‘사람, 사회, 건축, 도시’를 주제로 20여 권의 책을 저술했다. 1970년대 말, 대학원생 시절 임시행정수도 건설에도 관여했고,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부 하에서 서울 도시 계획에 깊이 관여했다. 1994년 시사잡지 <타임(TIME)>에 의해 차세대 리더 100인에 선정된 바 있다. 비례대표의 취지에 비추어 보면 아마 가장 부합되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 김진애 의원은 2004년에 열린우리당 공천으로 서울 용산에 출마했다)

 

김진애는 <도시 읽는 CEO>에서 독자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당신이 사는 도시를 얼마나 잘 알고 있나? 당신은 당신이 사는 도시를 그릴 수 있나? 당신은 당신이 사는 도시의 역사를 설명할 수 있나? 당신은 당신이 사는 도시를 이방인에게 어떻게 표현하나?

 

사실 나는 1982년 대학 입학 이후 거의 서울에서 살았다. (40여 년 전에는 집에 칼라풀한 책이 없던 관계로) 어릴 때부터 칼라풀한 지도 보는 것이 취미였다. 지금은 각종 통계를 보는 것이 취미이자 업이다. 관악산, 북한산, 인왕산, 남산, 아차산도 수없이 올라가 보았다. 관악, 영등포, 동작, 서초, 은평, 구로, 금천 등 서울 곳곳에서 살아 보았다. 게다가 지금은 서울시정을 연구 하고 있다. 하지만 김진애의 이 질문에 제대로 답할 수가 없다. 나는 아직도 서울의 지리, 도시계획, 경제, 교육, 문화, 복지의 핵심 문제를 찾아내기 위해 골싸 메고 있다. 

 

김진애는 도시 지리의 핵심을 파악하는 일의 중요성을 깨달은 경험을 이렇게 얘기한다.

 

번쩍 하던 그 순간을 생각하면 지금도 떨린다. 유학 첫 학기였다……나는 한 강의에 완전히 넋을 잃어버렸다. 강의는 ‘도시형태이론(Theory of City Form), 교수는 줄리앙 바이나트…...90분 강의는 독특했다. 세계의 도시들을 넘나들며 도시의 형태 속에 숨은 이론들을 짚어내는 구성이다……첫 60분은 논리를 펴나가고 학생들에게 의문을 던지고 칠판에 단순한 다이어그램(개념도)을 그려간다. 근사한 이미지에 눈이 먼저 팔리면 본질을 잃어버릴 위험이 커지는데, 의문을 선명히 하고 구조를 알고 난 후에 그림을 보면 ‘아!’하게 된다. ……처음으로 그 도시들이 내 머리에 그려졌다. 조각조각 알고 있던 파편들이 갑자기 짜임새 있게 전체 그림으로 맞춰졌고 이 엄청난 크기의 도시가 갑자기 하나의 그림으로 다가 온 것이다. 어떻게 런던은 런던이 되었나, 어떻게 파리가 파리가 되었나, 그 까닭이 한 편의 소설처럼 들어맞는 것이었다. 그 파워는 바로 통찰력에서 나온다……전체를 통찰하는 힘, 구조를 파악하는 힘, 핵심을 파악하는 힘, 개념을 세우는 힘, 전체와 부분의 연관성을 이해하는 힘, 통찰력은 우리 모두 지향해야 할 파워다. MIT에 있는 동안 나는 그 강의를 세 번 더 가서 들었다……가슴을 뛰게 하기 위해서……다시 지적 감동을 느끼기 위해서.(P66~68)

 

김진애는 유학 시절 이런 깨달음을 간직하고, 1988년 몇 개월 동안 서울에 푹 빠졌다고 한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열린 ‘밀라노 트리엔날레’(3년에 한번씩 열리는 디자인 전시회)에서 서울이라는 도시를 홍보해야 할 임무를 맡았기 때문이다.  김진애는 그 때 잠자는 시간 빼고 서울에 대한 역사 자료, 문화 자료, 도시계획자료, 통계자료, 사진자료, 지도 자료에 푹 빠졌다고 한다. (군사안보상 이유로 여간 해서 서울 상공을 날 수 없던 시절) 헬리콥터를 타고 서울 영공을 누비고, 고층 건물 옥상에 올라가 사진 촬영을 하고, 달동네, , 강변 등 서울의 구석구석을 누볐다고 한다.

 

거대 도시 서울 그리기

김진애는 이처럼 치열한 모색 과정을 거쳐서 파악한 서울 지리의 핵심을 이렇게 설명한다.

 

수없이 서울을 그려보고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후에 나는 서울을 다음과 같은 차례로 그린다.

 

1. W자 모양의 한강을 그린다. 한강은 서울의 가장 강렬한 얼개다.

2. 외사산(外四山)과 내사산(內四山)을 그린다. 서울의 커다란 영역에 대한 감이 잡힌다.

3. 강북의 사대문 안에 달걀형 동그라미를 그린다. 서울의 시작은 동그라미다.

4. 강남의 격자형 구조를 그린다. 강북과 대비되는 구조다.

5. 서울의 동서남북을 팽창하는 동네 영역을 그린다. ‘달동네’도 빼놓지 않는다.

6. 사방팔방으로 뻗어가는 큰 도로와 철도를 그린다. 서쪽 인천 방향, 남쪽 경부 방향이 큰 줄기다. 간선도로 중심의 방사상 도로와 순환도로가 주요 뼈대가 된다.

7. 수도권의 주요 도시들과 계획 신도시들을 점 찍는다.

8. 수도권으로 뻗는 방사상 도로와 수도권 순환도로를 그린다. 이제 외사산 밖까지 포함되는 거대도시 서울이 그려졌다. (중략)(P88~90)

 

이것이 <도시 읽는 CEO> 89페이지에 있는 그림이다. 한번만 보면 아무나 그릴 수 있는 그림이다. 하지만 아무나 그릴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콜롬부스의 달걀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김진애가 말하려고 하는 핵심은 서울이 이렇다는 것이 아니다. 김진애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다.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그 무엇을 설명하려고 할 때, 가장 쉽게 설명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그 사람의 호기심을 끌어낼 수 있을까? 어떻게 가장 중요한 것에 대해서 소통할 수 있을까? 이런 작업은 필연적으로 통찰력을 필요로 한다. 물론 그 통찰력이 아무 때나 나오는 것은 아니다. 성의를 기울인 작업 과정이 필요하고, 끈질기게 핵심을 물고 늘어지는 끈기가 필요하고, 상대편의 호기심의 입장에 서보는 역지사지가 필요하며, 개념을 파악하고자 하는 호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통찰이란 복잡하게 보이는 전체의 핵심을 파악하는 작업이다. 통찰을 추구하는 과정 중에 나의 경우는 ‘그려보기’가 크게 도움이 된다.(중략) 그려보기를 사용하는 것은……그려보기가 입체적인 사고, 핵심적인 사고, 관계적인 사고, 총합적인 사고, 개념적인 사고를 촉발하기 때문이다. (중략) 한 조직의 CEO라면 자신이 운영하는 조직, 또한 자신이 일하고 있는 분야에 대해서 조직의 체계, 시장의 판도, 기술 혁신의 방향 등 그 핵심을 함축하는 개념도를 그려낼 수 있어야 한다. (중략) 지적 감동, 즉 생각의 파동을 일으키는 것은 어떻게 핵심에 다가가느냐이다. 보이는 현상에 현혹되지 않고 본질을 흐리는 곁가지에 흔들리지 않으면서 개념과 구조와 본질을 꿰뚫고자 하는 끈기가 필요하다.(<도시읽는 CEO> p88~93) 

 

자 이제 본론을 말하려고 한다.

김진애가 이 그림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서울이 이렇게 생겼다는 것이 아니라 복잡하게 보이는 대상의 핵심을 파악하는 일, 이를 간단한 도식으로 표현하는 일의 중요성과 어려움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한국 사회와 진보(개혁)의 복잡다단한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수많은 진보 지도자들이, 김진애가 서울을 볼 때 쓴 눈을 그대로 빌려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 한국 보수의 문제도, 한국 진보(개혁)의 문제도 거대하고 복잡다단한 한국 사회의 핵심 문제를 제대로 짚어내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나친 경쟁인가? 공교육의 무능인가?

단적으로 한국 중.고등 교육의 핵심은 무엇인가? 이기정(창동고 국어교사)은 이렇게 말한다.

“과거에는 학생.학부모의 불만의 핵심은 촌지였다. 촌지에 의한 차별 이었다. 그래서 촌지 거부를 선언한 전교조가 칭송을 받았다. 그런데 지금의 핵심 문제는 무엇인가? 나는 공교육의 무능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보수는 무능의 문제를 적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다만 보수적인 방식 내지 후진적인 방식으로 대처할 뿐이다. 그것이 학생.학부모의 학교 선택권 강화, 평준화 폐지, (0교시, 우열반, 방과후 수업 등)수업시간 연장, 일제고사 등 평가 강화, 학생간/학교간 경쟁 강화, 교육관료와 학교장의 교사에 대한 지배력(교원 평가) 강화 등이다.

 

그런데 진보는 학생.학부모의 요구, 불만의 핵심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한마디로 무능의 문제에 대해 제대로 응답하지 못하고 있다. 학력, 학벌, 학과, 직능(자격증), 직장에 의한 극심한 차별이 엄존하기에 중고교 차원에서는 뾰족한 대책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지나친 경쟁’을 주적으로 삼는다. 그것도 경쟁의 무풍 지대에 있는 교사들이!  또한 개인.가족에 대한 국가.사회의 책임성 강화라는 미명하에 ‘공짜’(무상) 카드를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른다. 급식 무상, 고교 무상, 유치원 무상, 18세 이하 무상의료…… 뿐만 아니라 무능의 문제를 돈과 교사 수를 늘려서만 해결하려고 한다. 학교에서 사무행정과 수업을 분리한다든지, 평가보상(상벌)체계를 바로 세우는 등의 방식(교장과 교육관료에게 집중된 권력을 학생과 학부모에게 옮기는 방식)으로 기존의 재원과 인력으로 교육의 효과성과 효율성을 획기적으로 올리려는 시도를 백안시 한다. 경쟁을 강화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진보가 교육에 대한 학생, 학부모의 불만의 핵심을 파악하지 못하니 형편없는 보수에게 깨지는 것이다.

 

시대정신이랄까, 다수 국민들의 요구, 불만의 핵심을 파악하지 못하는 일은 어디 중.고교 교육 분야뿐이겠는가?  사실 나는 몇 권의 책과 정치통계 등 수많은 글을 통해서 김진애가 던진 질문과 유사한 질문을 무수히 던져 왔다.

 

‘당신은 당신이 사는 이 나라를 얼마나 알고 있나? 한국 사회가 인체라면 CT, MRI, Xray, 혈액검사, 대소변 검사를 해 본 적이 있나? 수많은 데이터=통계를 (시계열로) 그 추이를 분석하고, 다른 나라와 비교해 본 적이 있나? 다양한 통계를 종합해 본 적이 있나?

 

나는 국가경영의 관건도, 진보 혁신의 관건도 이런 의문에 답하는 것이라고 외쳐왔다. 그래서 김진애가 서울 그림으로 강조한 핵심 파악, 단순화, 개념화의 중요성에 깊이 공감하는 지도 모른다.

 

“한국 사회를 바로 보기 위해서는 수많은 연역과 귀납, 가설과 검증을 거쳐 정립된 간명한 사회 모델(인식 틀)이 필요하다. 한국 사회는 거대한 코끼리이고 우리는 하나같이 그 한 부위를 만지는 장님이나 다름없기에, 코끼리의 전체상을 포착하기 위해서는……간명한 모델이 필수 불가결하다. 이 모델은 핵심적인 모순과 부조리를 잘 드러내고, 동시에 다양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현상을 잘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모델이 없으면 아무리 체험이 풍부하고, 가진 통계 정보가 많아도 그 전체상을 제대로 포착할 수가 없다. 따라서 핵심적인 모순과 부조리를 파악할 수가 없고, 가치, 정책의 우선순위와 기조를 제대로 잡을 수가 없다. 총론적 개혁 담론과 각론적 개혁 담론을 묶어주는 철학도 정립할 수 없다. (<노무현 이후>)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확 구부러진 사회

나도 지난 20여 년 간 수많은 경험, 자료(통계), 연구를 집약하여 한국 사회의 모순.부조리 개념도를 그려 보았다. 이 핵심 개념은 한국은 보수 이익집단에 의해 오른 쪽으로 확 구부러진 사회이자 진보 이익집단에 의해 왼쪽으로 확 구부러진 사회라는 것이다. 구부러진 것은 정의(지속가능한 사회 발전 원리)와 상식과 원칙이다.

한국 공공(정치, 행정, 사법, 언론 등)은 때로는 보수와 때로는 진보 이익집단과 협력한다. 이 그림은 한국 사회의 수많은 굵직한 모순.부조리와 수수께끼 같은 현상을 다 설명한다. 이 모든 왜곡이 생긴 것은 결국 공공이 무능하거나 스스로 이익집단화 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진보가 정의와 상식을 바로 세우는 쪽으로 힘을 기울인 것이 아니라, 자신(조직된 이익집단)의 영역으로 더 많은 잉여를 쓸어 넣고, 더 적은 경쟁(시장)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현 세대 자신에게만 유리한 불합리한 게임규칙을 밀어붙였기 때문이다. 이런 이중 왜곡 구조를 자신들이 주도적으로 만들어 놓고 오로지 상대방에게만 손가락 하는 것이 서구와 확연히 다른 한국 진보와 보수의 특징이 아닐까 한다. 그래서 보수는 좌파, 친북 타령을, 진보는 시장, 경쟁 타령을 끊임없이 해 댄다.

 

다시말해 정의 실현이 본령인 공공이 부실한 환경에서는 유능한 개인 및 집단은 자신이 서 있는 분야로는 시장원리(소비자 선택권/심판권)나 경쟁이 밀어닥치지 못하도록 한다. 이들은 예외 없이 정치적, 이념적으로 과잉 대표성을 행사하고, 거대한 정치, 경제, 사회적 지대(특권,특혜)를 누린다. 신자유주의 반대를 고창하는 존재들, 공공부문, 토건족, 은행, 독과점 기업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자신에게 유리한 게임규칙을 통해 엄청난 불로소득을 누린다. 재정과 가계를 소리 소문 없이 약탈한다. 당연히 이들의 처우는(고용, 임금, 수익성 등) 한국 평균 소득 수준에 비추어 세계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연히 한번 들어온 사람은 떠나는 사람이 없기에, 이곳의 평균 연령은 급격히 상승하고, 구조조정은 거의 불가능하며, 신참자들의 입사(진입) 경쟁률은 살인적이다.

 

다른 한편 공공이 부실한 환경에서는 유능한 개인 및 집단은 타인에 대해서는 지대(특권, 특혜) 일소를 요구한다. 자유로운 선택권. 심판권과 각종 규제(최저 기준 포함) 완화를 요구한다. 따라서 3비층(비경제활동인구, 비임금근로자, 비정규직), 청년세대, 하청 협력업체 등 대다수 비기득권 층은 공적 규제(공정거래법, 소비자 보호법 등)나 사회안전망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엄청난 경쟁과 심각한 기회 부족에 신음한다. 청년 실업, 3비층, 각종 고시, 공시 열풍과 그 낭인 문제, 공기업 입사 경쟁률과 중소기업 인재기근, 시간강사, 사교육.유학 광풍 등의 사회적 진앙은 바로 이것이다.

 

한국 진보(개혁)가 이중 왜곡 사회를 연출 내지 방조한 것은 진보의 이념.정책적 한계와 힘의 한계가 결합되어 있을 것이다. 이념.정책적 한계는 북한이 미.일 제국주의로부터 자주.자립을 추구하는 것을 최상위 가치로 놓듯이, 남한 진보는 대체로 시장, 자유, 경쟁, 개방을 대단히 불편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이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최상위 가치로 놓기 때문이다. 또한 공동체 전체와 3비층과 중소기업과 미래 세대를 깊이 고려할 만한 정신적, 사상적 품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는 A이익집단으로 B이익집단을 견제하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책략에 서툴렀기 때문이다. 예컨대 1987년이 낳은 큰 아들이나 마찬가지인 조직노동이 보수이익 집단을 효과적으로 견제하지도 못하고, 3비층과 중소기업을 제대로 배려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둘째, 셋째 아들 격인 진보 정당들과 진보 언론도 이미 철 지난 철학, 가치, 시스템, 리더십으로부터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힘의 한계라는 것은 경제, 언론, 사법, 사학, 종교 등을 장악한 보수 권력이 너무 세다 보니 공무원이라도 자신의 편으로 만들기 위해 선심을 너무 썼기 때문이다.

 

어쨌든 오른 쪽으로 확 구부러진 현상(과도한 부동산 불로소득, 독과점과 불공정 거래, 토건 위주, 경제개발 위주의 재정 할당=빈약한 복지 재정, 개인.가족에 대한 국가.사회의 무책임성, 사법엘리트의 전횡, 부정부패, 냉전적 문화 등)은 그 연원이 오래 되었다. 왼쪽으로 확 구부러진 현상(노동의 양.질과 무관한, 단결력(파괴력)과 기업 수익성에 연동된 처우 체계, 광범위한 시장.경쟁의 무풍지대, 공공부문의 양반관료화 등)은 그 연원이 오래 되지 않았다. 전체적인 구조를 뜯어보면 구악(보수가 만든 악)이 훨씬 심각하다 해도 신악(진보와 공공이 만든 악)이 최근에 생긴만큼 비슷한 악으로 치부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게다가 여간 해서는 바꿀 수 없는 상수인 언론 지형으로 인해 구악은 축소지향의 오목렌즈로, 신악은 확대경으로 바라보니! 뿐만 아니라 보수는 민간주도의 확대 재생산 의지와 국제 경쟁력 강화 의지가 충만한데 반해, 진보는 현 상태 유지 의지(고용 안정 등)는 선명하나 나머지는 모호하니! 더구나 성장에 의한 고용창출과 소비(내수) 확대 외에는 그 답이 없어 뵈는 3비층이 너무나 거대한 상황에서는! (이 그림의 통계적 근거와 이 그림으로 설명할 수 있는 정치사회 현상과 이 그림에 근거한 대안을 집약한 책이 <노무현 이후>라고 자부한다.)

 

어쨌든 불쌍한 민초들은 신악이 너무 커 보이면 구악 친화적이라 할지라도 보수의 손을 들어주고, 구악이 너무 커 보이면 신악 친화적이라 할지라도 진보의 손을 들어 줄 수 밖에 없다. 이것이 지난 몇 년간의 엄청난 정치변동의 원인이다. 이 그림으로 보면 보수든 진보든 역사의 주도권을 쥐는 비법은 명확하다. 자신이 싼 똥을 열심히 치우면서 상대가 싼 똥의 패악을 열심히 지적하는 것이다.  이것을 이념으로, 그것도 좀 섹시하게 정식화 하면 좌파신자유주의 2.0(노무현의 그것이 1.0이라면), 우파 사민주의 1.0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념 정책적 우위를 확보하는 것은 김진애가 그랬듯이 무수히 많은 정치, 경제, 사회 현안들을 그림으로 그려보는 것, 즉 핵심의 도식화가 아닐까 한다. 또 하나 덧붙인다면 좋은 공공정책을 이곳 저곳에서 파 와서 잘 조합하면 되는 꽃꽂이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나무들이 즐비한 큰 숲으로 보는 것이 아닐까 한다. 좋은 지형, 토양, , 묘목, 관리인을 갖추고 오랜 시간 가꾸어야 하는 그런 숲 말이다. 공공정책을 한 순간의 반짝이는 아이디어로 만드는 포장지나 광고 카피가 아니라, 피부이자 얼굴이자 영혼으로 보는 지적 태도 말이다. 이런 관점이 없다면 이기정이 지적하였듯이, 진보의 교육정책을 얘기하라고 하면 경쟁 자체를 주적으로 삼고, 공짜(무상)와 친환경-2008년 서울시 교육감 선거 때 주경복의 대표 공약이 "광우병, 아토피 걱정없는 친환경 직영급식 실현"이었다- 등 후순위 가치를 대안으로 삼는 식의 우를 계속 범할 것이다. 2012년 대선은 2007년 대선처럼 한탕주의, 투기주의, (문국현에 대한) 비이성적인 기대감이 횡행하고, (정동영이 보여준) 진정성도 감동도 없는 공약이 난무하고, 진보는 또 한번 지리멸멸 콩가루 집안이 되어 망할 것이다.–끝-
http://www.goodpol.net/discussion/progress.board/entry/276

by 김대호 | 2009/11/18 22:07 | 정치와 통계 | 트랙백 | 덧글(1)

<다시 진보를 생각한다>(김창호 전국정홍보처장, 동녘) 서평

-조중동과 가장 처절히 싸운 戰士의 성찰과 대안이 담긴 묵직한 책-

                                                                                   김대호(사회디자인연구소 소장)

 

김창호 전국정홍보처장이 동녘 출판사에서 <다시 진보를 생각한다>라는 책을 냈다. 11월 10일 저녁에는 출판기념 토론회를 했다. 나는 박순성 교수, 정상호 교수, 김민전 교수와 함께 토론자로 나갔다. 이 글은 그 토론 요지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355면짜리 정치 비평서다. 저자의 표현에 의하면 ‘사회정치철학적인 현실비평서’다. “우리 사회의 근본 프레임을 바꾸는 진보와 민주주의를 위한 교과서를 쓰고 싶다”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절절한 소망에 대한 응답이라고 할 수 있다. 내 책 <노무현 이후-새시대 플랫폼은 무엇인가->처럼 노무현 대통령이 미처 답을 쓰지 못하고 간 난제(과제)에 대한 저자 나름대로의 답안이라고도 할 수 있다. 현실 정치 분야에서는 민주당의 혁신, 국민참여당, 시민주권 모임, 민주통합시민행동 등이 그 답안으로 제출된 것 일 텐데, 글쎄 노전대통령이 채점을 한다면 몇 점이나 줄지?? 내 예상으로는 아무래도 점수가 좋게 나올 것 같지가 않다. 내가 관여하고 있는 책이나 담론 분야 점수는 모르겠다.

 

참여정부에서 고위직을 지냈던 사람들이 낸 책은 적지 않다. 2009년에 출간된 책 중에서 기억나는 것은 이렇다. 김병준 전정책실장의 <지방자치론>, 이용섭 전장관/의원의 <초일류 국가를 향한 도전(2009.9)>, 정세균 대표의 <정치 에너지 -더 진보적이고, 더 민주적이며, 더 서민적으로-(2009.9)>, 이병완 전비서실장의 <박정희의 나라 김대중의 나라 그리고 노무현의 나라(2009.9)>, 유시민 전장관의 <후불제 민주주의(2009.3)> <청춘의 독서(2009.10)> 등이 있다. 정치적 급은 좀 떨어지지만 강동원 전감사의 <공기업 판도라의 상자1,2(2009.9)>도 있다. 이 중에서 이른바 친노로 불릴 정도로, 노대통령과 철학, 가치, 정서도 비슷하고, 정치적 운명도 함께하다시피 한 사람은 김병준, 이병완, 유시민, 김창호 정도다. 김병준의 책은 대학 교재이며, 유시민의 책은 대중 정치 교양서라고 보아야 한다. 애초부터 지식사회나 진보개혁 리더들을 주 독자로 설정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이병완의 책은 참여정부에 대한 변호, 노대통령과의 추억, 자신의 연설문 등을 짜깁기 한 책이다. 그런데 김창호의 책은 참여정부에 대한 성찰과 진보 혁신(재구성)의 길을 수미일관한 논문적 체계로 서술했다. 집필 기간이 아무리 적게 잡아도 3~4년은 되어 보인다. 책에서 다룬 주요 화두를 머리 속에서 그 기간 동안 계속 이고 다녔다는 느낌이 들어서다. 게 중에는 10~20년간 다듬고 숙성시킨 생각도 보인다. 몇 페이지만 들춰봐도 엄청난 땀(통계, 자료, 고증, 깊고 넓은 독서 등) 냄새와 사색의 냄새가 난다. 주 독자층도 일반 대중이 아니라 최상층 독자층; 지식 사회와 진보개혁 리더들이다.

 

이른바 친노 인사가 낸 책으로서 상층 독자층을 대상으로 묵직한 메시지를 던지면서, 논문적 체계를 가진 정치비평서는 2007 2월에 낸 조기숙 수석비서관의 <마법에 걸린 나라>가 있다. 그런데 이 책은 때가 때인지라 참여정부에 대한 부당한 폄하에 대한 억울함, 진보 진영에 대한 답답함과 서운함 등이 강하게 묻어나다 보니 성찰과 대안이 상대적으로 취약하다.  이래 저래 김창호 처장의 <다시 진보를 생각한다>는 참여정부(친노)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인사들이 낸 책 중에서 격이 다른 책이다. 그 메시지가 옳든 그르든……

 

책의 핵심 메시지는 (민주주의의 최후 보루인) “깨어있는 시민들의 조직된 힘”을 만드는 사업을 진보의 중심에 놓자는 것이다. 즉 진보 에너지를 제도권 내 정당 활동으로 축소시키지 말고, “생활세계의 진보적 재구성”으로 확장하자는 것이다. 그리하여 “시민사회의 헤게모니”를 장악하자는 것이다. 그 근거지는 “진보적 시민공동체”이다. 요컨대 “진보적 시민공동체운동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하방정치’(지역 정치, 지방선거 등)”를 전개해 나가자는 것이다.

 

김창호의 주장을 축구에 빗대서 얘기하면, (다른 담론들이 전술, 기술 강화론 이라면) 이는 기초 체력 강화론 이라고 할 수 있다. 히딩크 감독이 2000~2001년에 강조한 그것 말이다.

 

진보의 기초 체력 강화가 필요하다는 것은 전적으로 옳다. 그런데 이것이 축구로 치면 전술.기술.팀워크 등에 해당하는 가치, 비전, 전략, 정책, 정무의 중요성을 경시하는 데까지 나간다면 곤란하다. 사실 참여정부 인사들은 대체로 ‘(참여정부는) 최선을 다했으나 역부족’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진보개혁 세력의 힘 내지 깨어있는 시민들의 조직된 힘을 기르는 것이 진보 부활의 근본적인 대안이라고 말한다. 김창호의 얘기도 크게 보면 이런 범주에 속한다. 적어도 전술.기술을 경시하고 기초 체력 강화에 치중하자는 얘기로 오해 받을 소지가 있다.

 

어쨌든 내가 현실을 잘 몰라서 하는 소린지 모르지만 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 그리고 지금의 제 진보개혁 정치세력 공히 전술.기술 측면에서 아쉬운 점이 너무 많다. 단적으로 참여정부에 대해 말한다면, 그 처지가 도덕주의라는 무기를 주요하게 사용하지 않으면 안될 만큼 열악한 상황이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쓸 수 있는 무기는 적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현실을 모르는 사람(좌파)들의 멋진 정치적 상상-대폭적인 증세와 복지 재정 확충, 지지 층에 대한 각종 물질적 이익/이권 제공 등-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우리 나름의 거래 정치 내지 이익 정치(以夷制夷 정치) 여지는 컸다고 생각된다. 단적으로 학교 시스템을 약간만 바꿨다면 꽤 괜찮은 사람들이 지금보다 훨씬 많이 교장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지금 보다 훨씬 합리적인 교원 평가 시스템도 도입 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외고, 특목고로 인한 사교육비 고통도 훨씬 경감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비록 어리석기 짝이 없는 전교조가 극력 반대했다 하더라도…… 또한 정부조달 시스템을 개혁하여 대기업이 아닌 벤처중소기업을 훨씬 많이 배려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공무원이 되기 위해 인생을 고시원 쪽 방에서 소모적으로 불사르는 청년들의 숫자도 훨씬 줄일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지나치게 높은 대학진학률도, 청년 실업률도, 3비층의 고통도 마찬가지다.

적어도 한국의 강고한 반동적 경제사회 구조와 지극히 높은 기대. 요구 수준을 감안 할 때 보수로의 정권 교체를 막아내기는 쉽지 않았다 하더라도, 진보가 이 정도로 사분오열, 지리멸멸, 앞날 캄캄 하게는 되지 않을 방법은 있었다고 생각된다. 노무현이 부엉이 바위 위에 서지 않을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나는 이런 생각=가설을 <진보와 보수를 넘어>(2007), <희망한국프로젝트>(2007), <노무현 이후> 등에 담았다)

 

길게 내 우려를 서술하긴 했지만 확신컨대 김창호의 핵심 메시지는 배타적인 기초 체력 강화론(전술.기술 무시론)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대중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다양한 활동 없이, 즉 대중에게 감동을 주는 운동 이나 자기 헌신 없이 오로지 노무현을 팔면서 그 추모 에너지를 제도권 내 정당 활동 또는 상층 정치 활동에 매진하는 행태에 대한 비판일 것이다. 또한 낮은 곳으로 하방해서 긴 호흡으로 새로 시작하자는 것일 것이다. 진보 운동과 진보 정치의 기본을 충실히 하자는 것일 것이다. 이는 전적으로 공감한다. 그런데 나는 진보 운동 혹은 진보 정치의 기본은 상층 정치를 멀리하고 낮은데로 임하는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참여정부 고위 인사들이 지방선거에 대거 나오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진정으로 기본에 충실한 정치는 대중이 절실히 염원하지만, 정치 세력(지도자들)이 힘들어서 잘 안 하거나 못하는 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중이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대중운동이 그 하나다. 지난 민주정부 10년의 성과, 한계, 오류를 정확하게 평가 반성하는 것도 하나다. 거대하고 복잡한 한국 사회의 모순.부조리 구조와 나아갈 길을 정확하게 밝히는 것도 하나다. 노무현이 대중들에게 감동을 준 그 기풍; 진정성, 책임성, 치열한 탐구성, 두터움, 대의에 대한 사심 없는 헌신 등을 구현하는 것도 하나다.

 

나는 김창호 처장의 책에 흐르는 정신과 대체적인 방법에는 공감한다. 하지만 지방 선거(정치)와 시민공동체를 너무 중시하는 듯한 입장에는 공감하지 않는다. 단적으로 지방 선거는 악전고투를 하더라도 수많은 진보의 정치 인재들이 반드시 성과를 내야 할 전장은 맞지만, 마오쩌뚱이 농촌을 석권하여 도시를 포위하는 방식처럼, 지방 정치를 석권하여 중앙 정치를 변화시킨다는 발상은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한다.

 

다 아는 얘기지만, 보수 정치세력은 재정과 이권이 흐르는 길(지역=선거구) 주변에 집중 포진해 있다. 따라서 지역, 특히 감시가 느슨한 (수도권에서 먼) 지방에 뿌리가 깊다. 보수 정치 세력은 지역에 뿌리내린 토건업자와 자영업자의 상층을 기반으로 하기에 지방 선거에는 특별히 강할 수 밖에 없다. 반면에 진보는 공적 가치가 흐르는 길 주변에 집중 포진해 있다. 이 길은 주로 인터넷이다. 인터넷에 모여서 와글와글 웅성웅성 대며 공적 가치를 공유한다. 따라서 진보는 관심이 전국구다. 아니 코스모폴리탄이다. 당연히 지역에 이해관계도 적고, 관심도 적다. 대도시의 경우 수틀리면 이사해 버린다. 따라서 광역단체장, 시장, 군수, 구청장이 누가 되든 얻을 이익이 상대적으로 적다. 적어도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보수 이익집단(업자들)은 누가 되느냐에 따라 엄청난 물질적 이익이 왔다 갔다 한다. 게다가 한국의 지방권력은 상대적으로 약하기에(교육, 조세, 경찰, 검찰 관련 권능, 주요한 규제권은 중앙에 집중되어 있다) 지방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은 상대적으로 약하다. 이는 지방 정치에서 조직된 이익집단의 입김이 강할 수 밖에 없는 구조이다. 그래서 지방은 시간이 흐르면서 영.호남을 가리지 않고 재정과 이권을 쫓는 토호들의 비중이 점점 높아져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진보가 지방자치를 포기해야 한다거나, 지방자치의 권능을 왜소화하자는 것이 아니다. 애초부터 진보 정치에 불리한 구조를 감안하여 더 현명하게 대처하자는 것이다. 예컨대 선거판(선거구)을 작게 하기 보다는 크게 하는 것이 그 하나다. 단적으로 한국은 사람들이 별로 관심이 없는 구의원, 시의원, 도의원 선거 보다는 인터넷 등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떠들어댈 수 있는 대통령선거, 국회의원선거, 광역단체장 선거, 시장선거가 상대적으로 유리하다. 이를 감안하면 진보는 가능하면 판을 키워야 한다. 선거구든, 권능이든……

 

김처장이 강조하는 핵심 문제의식은 공정무역 운동 같은 시민운동을 발전시켜, 무수히 많은 참여자, 지지자를 조직하여 하나의 해류를 만들어, 노동당과 보수당이라는 배를 태우고 가는 영국 시민운동의 사례로 뒷받침했더라면 훨씬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말과 글만 가지고 본다면 노전대통령과 친노 인사들은 선비적 문제의식이랄까 선비적 명분 정치에는 투철한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상인적 현실 감각이랄까, 상인적 거래/이익 정치에는 익숙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나는 김창호 처장의 ‘아래로 내려가자’, ‘기본에 충실하자’는 주장이 상인적 거래/이익정치와 결합하면 훨씬 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진보의 미완의 큰 정치 전략; (민주주의, 공화주의에 더하여) 자유주의, 시장주의의 합리적 핵심 흡수, 물질적 문화적 생산력을 선도하는 벤처중소기업과 지식근로자의 결집, 3비층의 견인, 철학, 가치 측면에서 진보의 (중도로의) 확장=유연화 등도 강조했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거나 이 책은 현재까지 나온 참여정부 핵심 인사들의 저작 중에서 가장 공력이 많이 들었고, 메시지도 가장 묵직한 책이다. 또한 보수의 핵심 조중동과 가장 처절히 싸운 전사의 성찰과 대안이 담긴 가치있는 책이다. 대한민국과 진보의 앞날을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꼭 일독을 권한다. --

by 김대호 | 2009/11/13 07:35 | 책 비평 | 트랙백 | 덧글(2)

이명박 정부의 본명(本名)을 불러주자

이명박 정부의 본명(本名)을 불러주자

-도적, 먹튀, 분식이라는 수식어가 필요하다-

김대호(사회디자인연구소 소장)

 

이명박 정부를 어떻게 불러야 할까? 이명박 정부의 성격을 집약하는 가장 정확한 수식어는 무엇일까? 민주, 진보, 개혁으로 자신의 정치적 정체성을 표현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쓰는 수식어는 아마 ‘신자유주의’와 ‘독재/반민주’일 것이다. 전자를 주로 쓰는 사람들은 참여정부와 이명박 정부를 오십보백보로 본다. 당연히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 보니 이명박 정부를 ‘토건형 신자유주의’로, 참여정부를 ‘어정쩡한 신자유주의’ 혹은 ‘좌파 신자유주의’로 규정한다. 하지만 여전히 대중적 설득력이 있을 리가 없다. 한편 ‘독재/반민주’는 많이 사용되지 않는 수식어다. 독재/반민주의 전형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이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와 기본 상식을 무참하게 짓밟는 이명박 정부의 성격을 집약하는 정확한 개념이 없다 보니, 동일한 개념을 표현만 살짝 바꿔서 사용하곤 한다. ‘일방적 국정운영’ ‘밀어붙이기식 행태’ ‘핍박과 배제의 정치’ 등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일방적’과 ‘밀어붙이기’라는 개념은 비판자들의 의도와 달리, 과단성 있고 저돌적인 추진력을 기대하고 이명박을 지지한 사람들에게 지지의 정당성을 확인시켜주는 측면이 있다.

 

인간의 추상(抽象) 능력을 통해서 만들어진 개념(이름)은 본래 특정 측면은 부각시키고 나머지는 버리는 편광안경이다. 따라서 개념을 잘못 잡으면 엉뚱한 것을 포착하고, 정작 중요한 것은 버릴 수 있다. 그래서 개념이나 언어에 의해 마음이나 사고가 결정지어지고, 더 나아가 정치사회적 현상은 재창조된다. 2000년과 2004년 연이어 미국 대선에서 민주당이 패배한 이유를 분석한 책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로 유명해 진 인지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 박사는 인간의 인식과 사고(연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언어(개념)의 이런 특징을 설명하기 위해 ‘프레임’이라는 개념을 고안했다. 레이코프 박사에 따르면 프레임이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형성하는 정신적 구조물”로서, 이를 재구성한다는 건 “대중이 세상을 보는 방식을 바꾸는 것”이란다. 그런데 이는 동양권에서는 그리 새로운 얘기가 아니다. 공자는 제자 자로가 ‘정치를 한다면 무엇을 먼저 하겠냐’고 물었을 때, “반드시 名을 바로 잡겠다(必也正名乎)”라고 하여, 정치에 있어서 正名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사실 공자나 레이코프 박사가 뭐라고 했는지 알지 못해도, 이들의 통찰은 이미 한국 정치의 상식으로 자리 잡았다. ‘낙인 찍기’의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진보가 보수를 ‘신자유주의’ ’일방적’ ‘밀어붙이기’니 하면서 별로 설득력도 파괴력도 없는 낙인을 찍는 동안, 보수는 진보에 대해 ‘좌파’ ‘친북’ ‘무능’ ‘급진’이라는 낙인을 찍어 재미를 톡톡히 보았다. 물론 이런 낙인들은 결코 사실에 부합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국민들의 오랜 편견에 호소하고, 무엇보다도 보수 절대 우위의 언론 환경으로 인해 국민들의 뇌리를 깊숙이 파고 들었다. 그러면 도대체 이명박 정부와 보수 세력을 어떤 개념 내지 프레임으로 집약해야 할까? 한마디로 어떤 낙인을 찍어야 할까? 분명한 것은 진보에 절대 불리한 언론 환경으로 인해 이 낙인이 실체적 진실에 부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나아가 이 낙인은 때와 조건에 따라 다른 얼굴을 하는 이명박 정부의 성격과 행태를 통일적으로 모순 없이 설명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신자유주의라는 프레임은 실체적 진실에 부합되지도 않고, 이명박 정부의 여러가지 얼굴을 모순 없이 설명하지도 못하고, 무엇보다 개념조차 제각각 이다. 고노무현 대통령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신자유주의 정부로 규정하는 진보좌파를 비판하면서) 신자유주의를 ‘작은 정부 사상’을 핵심으로 한 부자를 위한 정책, 시장의 강자를 위한 정책으로 규정하였다. 반면에 진보좌파들은 신자유주의를 ‘워싱턴 컨센서스’가 강조한 개방화, 규제완화, 민영화 정책 패키지로 규정하였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엄청난 적자재정과 추경예산을 통해서 정부예산을 대폭적으로 늘리고, 부채에 기대어 공기업 예산을 폭발적으로 늘리고 있다. 한술 더 떠서 4대강 사업으로 인한 재정적자와 국가부채 규모를 축소하기 위해 10조원이 넘는 국책사업예산을 수자원공사, 철도공사 등 공기업에 떠넘기는 일종의 ‘분식 회계’도 감행하고 있다. 표리부동, 분식회계, 정보차단(불투명성 선호), 면종복배 등으로 표현되는 사기적 수법은 이명박 정부의 체질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신자유주의의 핵심 사상인 작은 정부 사상은 시장에 대한 정부의 부당한 개입을 줄이는 것이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집권초기에는 52개 중점 관리 품목을 설정하여 박정희식 지도단속을 통한 물가안정을 추구하였다. ‘MB물가’라는 신조어가 생겨났다. 한편 재벌대기업들의 국내 투자를 유무형의 규제, 처벌권으로 압박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간판 상품이 규제완화 인데, 이를 실행하기는커녕 가장 나쁜 초법적, 탈법적, 자의적 규제를 휘두르고 있다. KT•SK•LG 같은 굴지의 대기업에 대해, 일개 청와대 행정관이 250억 원의 기금 출연을 감히 요구할 수 있었던 것은 수틀리면 기업을 혼내 줄 다양한(초법적, 탈법적, 자의적) 수단이 있고, 그런 행동을 거리낌 없이 자행하는 패거리 문화가 있기 때문이다. KBS 신태섭 이사와 정연주 사장을 몰아낼 때 보여준 황당한 행태, 노전대통령에 대한 지극히 편파적이고 야비한 수사,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에 대한 국정원 의 소송 등은 이명박 정부와 한국의 자칭 보수 집단의 야만성, 폭력성, 몰염치성의 현주소를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다. 그러면서도 기업 경영권 시장을 왜곡하는 포이즌 필(Poison Pills) 제도를 도입하여 적은 지분으로 많은 기업군을 지배하는 몇몇 재벌들의 이해와 요구에 복무하고 있다. 친기업과 친시장을 완전히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의 주도 그룹과 핵심 지지층 자체가 권력을 통해 차지할 수 있는 각종 이권 추구에 익숙한 집단이다 보니 갖가지 방식으로 자리와 이권과 재정을 털어먹고 있다. 단적으로 기업, 금융기관의 기부금과 휴면예금을 합쳐서 총 2조원의 재원으로 ‘미소금융’재단을 만들어 그 운영권을 능력이 전혀 검증되지 않는 측근들에게 넘겼다. 자산 8천억 원의 삼성장학재단의 이사장 자리도 비상식적 무리수를 두면서 측근에게 넘겼다. ‘국민 부담률(GDP대비 세금+사회보험료의 비중) 감하’와 ‘부자 감세’야 전형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인데, 이명박 정부는 ‘부자감세’를 하긴 하는데, ‘국민부담률’ 상향과 ‘서민중산층 증세’를 밀어붙이고 있다. 아무리 보아도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이 하는 일은 신자유주의와 멀어도 너무나 멀다. 뿐만 아니라 자유주의, 민주주의, 시장경제와도 한참 멀다.

 

냉철하게 보면 이명박 정부와 한국 보수 세력의 다양한 행태를 관통하는 것은 아프리카 후진국식의 도적 정치, 먹튀 정치다. 일단 권력을 잡으면 자리를 철저히 자기 패거리에게만 배분하고, 다른 군벌이 쳐들어오기 전에 장갑차, 기관총을 앞세워 최대한 먹고 튀는 것이 아프리카식 도적 정치라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지금 한국에서 펼쳐지고 있는 도적 정치는 정신-공동체와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일단 같은 패거리가 먹을 수 있을 때 최대한 먹자주의-은 그들과 동일하나 방법은 숱한 변칙, 편법과 정보 숨기기, 분식 회계 등이다. 우아한 도적 정치라고나 할까? 정권을 무슨 비즈니스 모델로 여긴다고나 할까? 이명박 정부에게 정확한 이름을 붙여주자. 원래 분식에 능한 정부에게 신자유주의라는 한 때 세계적으로 유행하던 화장까지 시켜 우아하게 단장시켜 줄 필요가 없다. 암만 뜯어봐도 도적, 먹튀, 분식 이라는 수식어를 빼놓고 그 이름을 지을 수 없을 것 같다. -끝-(광장 2009년 가을호에 실은 글을 아주 조금 고쳤습니다)

 

by 김대호 | 2009/11/12 04:40 | 정치와 통계 | 트랙백 | 덧글(2)

http://theacro.com (김대호)초청토론회

11월 1일 일요일 정오부터 무려 5시간에 걸쳐서 http://theacro.com에서 김대호 초청 토론회가 있었습니다.
패널은 오돌또기, sonnet, 세간티니 이었고, 링크미가 사회, 오마담이 보조사회를 보고 약 50명의 방청객이 접속했습니다.

접속자들의 거주 지역은 미국, 영국, 독일, 중국, 일본, 오스트레일리아 등이었으니 일종의 글로벌 채팅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관심있는 분들은 보십시오. A4 50페이지 분량 입니다. 아래 글은 그 토론의 후반부(3부) 입니다.

대화 내용은 링크미님이 정리했습니다.
http://theacro.com/zbxe/zbxe/?document_srl=61312&act=trackback&key=161


3부
### 어떻게 개혁해야 하는가

nishi: 김대호님에게 질문이 두 개 있는데..

첫번째 질문은, 앞으로 한국경제가 파이를 키우고 앞에 나왔던 이야기, 지속적인 성장이 가능한 경제모델이 어떤 것일지, 현재의 상태랑 큰 차이가 있는 모델일지, 아니면 약간의 개선으로 가능할지, 혹은 지금 명박정부가 하는 것처럼 건설붐만 일으키지 않으면 되는 문제일지 그게 첫번째 질문이고요.

두번째는 지금 30대 초반 - 20대 전체가 한국경제에 생산자로서 참여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한국 정치(?) - 사회구조가 어떻게 바뀌어야 할지, 혹은 바뀔 필요가 없이 지금 형태로도 별 문제 없는 것일지 여기에 대한 김소장님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바이커: 저도 한가지 추가 질문을 하겠습니다. sonnet님의 질문은 진보 쪽에서도 궁금해할만한 부분이었습니다. 진보측에서도 사회를 디자인한다는 개념보다는 정책 이외에는, 약자의 권한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전반적 방향의 전환이 90년대 중반 이후 이루어진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히려 한국에서 이러한 개념의 도입이 늦어진거죠. 지방분권이라든가, 시민사회에 대한 논의라든가, 이런 것들이 모두 약자의 권한 강화라는 개념의 실현들이거든요. 대립하는 이해의 상충이 있을 때, 약자에게 대립할 수 잇는 정치적 능력을 줌으로써 전체적으로 위에서 만들 수 없는 균형을 만들자라는 개념입니다. 사회디자인과는 오히려 반대되는 개념이거든요. 어떤 면에서는 김소장님의 구상은 오히려 구좌파의 개념과 가장 일치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반면 김소장님의 구상에서는 이러한 권력, 권한에 대한 개념이 없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상입니다.



오돌또기: 바이커/ 공평과 반대되는 개념이라고 해야 맞는 것아닌가요?

김대호: 바이커님의 질문을 정확히 파악하지는 못하겠습니다. 잠깐 쉬는 동안 많은 얘기가 오갔군요. 그냥 인간의 자유와 행복의 토대인 일자리 문제를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상식적으로 일자리를 만드는 요체는 돈, 인재, 관심 등 사회적 자원의 흐름을 합리화 하는 상벌체계죠. 그 다음에는 미래학에 기반한 선택 집중 전략이죠. 예컨대 영종도에 신공항을 건설하는 것과 청주나 시화에 건설하는 것은 엄청 다릅니다. 국운이 왔다갔다 하죠. IT 등 많은 분야가 그렇지요. 지금 기후,환경,에너지, 자원 위기에서 이런 측면 중요하죠. 그 다음에 재정 할당 문제지요. 그 동안 진보는 상벌체계 문제나 미래학 문제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 안 쓰고, 세금 늘리고 재정 늘리고 공공부문 늘려서 복지를 튼실하게 하자는 얘기가 주였지요. 저는 기본적으로 한국 사회는 이중구조 사회이자, 세계사적 시간대와 한국사적 시간대가 불일치 하기에 신자유주의 개혁과 사민주의 개혁을 결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sonnet: 그런데 문제는 사회적 자원의 흐름을 "어떻게" 바꿔야 더 합리적으로 되는지 사실 우리가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바이커: 김소장님의 주장 내용은 자원 배분의 효율을 따지는 <행정>이지, 힘의 배분과 충돌을 따지는 <정치>가 없는 것 아닌가요?

김대호: 전통적 좌우 개념으로는 잘 이해안될 것 같습니다. 제 노선이 뭐냐고 묻는다면 글쎄 저는 좌파신자유주의2.0, 우파사민주의1.0, 전투적 중도주의라고 하지요. 저는 기여(능력), 부담, 의무에 비해 잉여나 기회를 적게 할당 받는 존재의 이해와 요구를 대변한다는 당파성이 있습니다. 이것만큼 정치과 관련이 깊은 생각이 있나요? 그리고 저는 청년인재는 시장과 가까운 쪽으로 가야 한다는 신념이 있습니다. 또한 정치적 지대, 경제적 지대는 합리화(대체로 축소 조정)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총만 안든 전쟁을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이쯤하죠.

### 노동소득 분배의 격차

바람계곡_: 비정규직 문제를 말씀하시면서 자본이 독식하기 때문이 아니라는 근거로 중소기업의 40%, 대기업의 20%가 이자보상배율1 이하라고 하셨습니다. 즉, 기업들의 영업이익이 그렇게 많지 않은 상황에서 기업들 입장에서는 인건비를 절감하기 위한 구조조정 노력이 불가피하다는 것이고, 그런 진단의 배경에는 정규직 고용자들의 '과도한 보상'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자지급비용이 영업이익을 상회한다는 것만을 놓고 그 책임의 무게중심을 정규직 고용이 가져가는 몫이 너무 크기 때문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성급한 것 아닌가요? 기업의 채무상환능력에 관한 지표를 근거로 (부실한)경영(능력)전반에 대한 진단과 의심이 아닌 특정 조직노동자들에게 분배가 편중되어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전에 쌍용차관련한 글에서도 경영진의 경영능력과 경영성과에 대한 것보다 노조에는 굉장히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 심지어는 김우중 회장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하시기도 하셨죠. 이런 점들이 김대호님의 의견에 상당수가 수긍하면서도 뭔가 인과관계에 대한 판단이 잘못된 것 아니냐. 라는 의구심을 가지게 만든다고 생각하는데요. 이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일단, 이것에 대해서 대답 듣고 다음 질문 드리겠습니다.

김대호: 제가 중시하는 지표중에 노동소득 분배율 통계가 있습니다. 저는 노동소득분배율을 임금노동자 비중으로 나눠보면 한국은 노동의 1단위가 미국, 일본, 독일에 비해 가져가는 몫이 꽤 높게 나옵니다. 평균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한국은 노동내의 격차가 엄청 크지요. 이로 미루어 보면 한국의 괜찮은 직업, 직장의 잉여가 우리 생산력 수준에 비해 매우 높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간티니: 잠깐만요. 제가 그 노동소득분배율 통계를 보니까 김대호 소장님께서는 자영업자까지 피용자 보수의 영역으로 분류하시는 것 같은데요, 자영업자는 경영잉여로 분류해야 하지 않을까요?

김대호: 아닙니다. 자영업은 따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최근에 쓴 노무현 이후에 그 표가 있습니다(자영업자 몫과 노동소득). 제 얘기는 총노동의 힘으로 총 자본을 압박해서 그 몫을 가져오는 방식은 전략적으로 올바른 선택이 아니라는 겁니다.

바람계곡_: 반론성격의 질문 하나 더. 미국, 일본 등 OECD선진국과 비교하면 -제가 구체적 통계는 잘 모르지만- 물가, 고용유연성(재취업, 재교육 등)과 같은 사회적 분위기, 사회보장 등 사회안전망도 같이 비교해야하지 않을까 생각되는데요. 이런 점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할때 노동단위당 소득이 높다는 지적이라고 이해해도 되겠습니까?

김대호: 제가 스웨덴 LO의 연대임금제, 노동계급 내의 자조 정신을 강조하는 것을 그 때문입니다.

바람계곡_: 즉, 말씀하시는 기득권 노동시장에서 밀려나는 노동자들을 자신의 이익을 담보해줄 수 있는 사회적 신뢰도 제도적 기반도 불충분한 상태에서 수준은 다르지만 고용안전성에 대한 불안을 느끼고 있는데 이것을 노동계층 내에서의 양극화라는 결과만을 놓고 양보를 요구하는것이 과연 효과가 있을지 의심스럽습니다. (이상)

김대호: 바람계곡님의 얘기는 거칠게 말하면 정규직 등 괜찮은 노동자들도 먹고 살기 힘든데 그것을 양보하라 하냐 이런 얘기 같습니다. 그 실천적 결론은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을 비경제활동인구와 실업자로 밀어버리는 방식이죠.

바람계곡_: 그보다는 좀 더 정밀하게 말씀 드리면, 자본에 대한 신뢰 즉, 우리가 양보하면 사회가 이롭게 되는가에 대한 신뢰문제, 그리고 앞서 지적한 점은... 정규직 노동계층 역시도 정리해고와 노동유연성에 대한 상당한 압박을 받고 있지만, 사회적 장치는 불충분한 상황에서 그런 타협점을 찾아내는 것이 과연 가능하겠는가..라는 문제제기입니다. 자본의 협력이 노동계층의 양보로 이루어진다고만 생각하는 것도 조금 무리가 있지 않을까 해서요.

김대호: 그렇죠 분명히 한국은 유연안정시스템으로 가야하고, 노동내 격차도 줄여야 하고, 이를 자조정신을 기본으로 해결해야죠. 그런데 안정성(사회안전망)은 늦게 오고 유연성만 빨리 오고, 상층 노동의 이익을 뺐고, 하층에게는 그 혜택이 안가고....이렇게 될 수 있죠. 그것을 막는 것이 진보 정치의 능력이자 시대적 과제 아니겠습니까? 분명한 것은 그런 위험성을 근거로 방어적 태도로 일관한다면 교원평가제관련 전교조의 어리석은 대응과 닮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바람계곡_: 답변 감사합니다. 원래 질문하고자 했던 것이 하나 더 있었는데... 별로 중요하지 않고, sonnet님과 바이커님의 지적과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므로... 나중에 시간이 되면 다시 질문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노동자의 정치세력화

세간티니: 제가 질문 몇가지를 드리겠습니다. 바람계곡님의 질문과 연결되어 있는데요. 김대호 소장님께서는 발제문에서도 화이트칼라노동자를 주체로 생각하시는 것같은데, 그에 반해 블루칼라 제조업 노동자들에 대해 상대적으로 경시하거나 적대시하는 느낌을 받거든요. 특히 소장님께서 사용하시는 각종통계자료등이 경총같은 사용자 입장에서 내놓은 자료를 통해서 제조업 노동자들에 대해 격렬하게 반감을 표시하는 것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예를 들어 제조업 평균임금과 국민소득 대비 자료같은 것 말이죠.

김대호: 제가 '노무현 이후'에서 쓴 통계의 대부분은 한국노동연구원에서 발간하는 노동통계 자료였습니다. 노동연구원은 결코 자본 편향적인 연구소가 아닙니다. 기업 측에서 낸 자료 중에서 제가 사용한 것은 현대차 사업장별 임금 수준이었습니다. 편향성이 있다는 것은 아는데, 이는 제가 대우자동차 9년을 다니면서 피부로 느낀 것과 일치하니까 그냥 썼습니다. 화이트 칼라는 피터드러커 식으로 말하면 지식근로자 입니다. 이 시대의 물질적 문화적 생산력을 선도하고, 네티즌의 주력이죠.

세간티니: 그런데, 정말 그렇게 한국 제조업의 평균임금이 높은 것입니까? 노조측에서 노동소득분배율이나 단위노동비용, 생산성 향상 같은 자료로 기업측 논리를 반박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김대호: 이들은 단결투쟁을 통해서 처우를 개선하기 곤란합니다. 연봉이 높다 해도 조종사 같은 기능직은 노조가 쉽지만, 기업의 대리, 과장, 차장은 노조가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공정한 경쟁과 공평한 보상을 더 선호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적절한 수준의 사회안전망을 원하고, 토건족등 쉽게 돈 먹는 것을 엄청 싫어하죠. 세간티니님, 제조업의 평균 임금이 높다는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사실입니다. 급속도로 생산성 향상이 되었으니 높은 것은 사실이죠. 그런데 그 생산성 향상이 의미하는 바는 인력사업구조조정-중국으로 기지 이전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제조업만 높은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괜찮은 직업, 직장이 다 마찬가지 입니다. 유럽 같으면 두 사람이 할 일을 한 사람이 하고, 두 사람이 나눠 가질 몫을 한 사람이 가져가죠.

세간티니: 네, 그렇군요. 그럼 화이트칼라 문제로 넘어가서요.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의 최대조직인 금융사무직노조같은 경우는 민노총에 가입하고 있습니다. 공공노조도 민노총에 최근 가입했구요. 정작 화이트칼라의 최대 단위노조들이 민노총과 민노당과 연결된 상황에서 화이트칼라를 중심으로한 새로운 정치세력을 형성한다는 것이 과연 쉽게 가능할까요?

김대호: 사실 사무금융노조는 항공기 조종사 같은 측면이 있죠. 창조적 노동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펀드매니저들, 증권사 직원들은 노조가 잘 안되죠. 공공노조는 미국, 일본에서도 가장 강력한 노조 중의 하나라고 알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의 산업구조 자체가 단결투쟁을 통해서 처우를 개선할 수 있는 노동이 매우 줄어들어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치적 압력단체로서 법, 제도 개선을 통해서 삶을 개선할 수 있는 존재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입니다. 파업을 통해서, 가치생산을 중단시켜 처우를 개선하는 방식은 지극히 제한 적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 좋은 규칙을 디자인하는 것

오돌또기: 미국에서는 민주당을 지지하지요. 전교조와 함께. 저는 질문이라기 보다는 김대호 소장님 이야길 듣고 나서 느낀 점을 코멘트하고 싶습니다. 제가 볼 때는 공평이라는 개념보다는 규칙이라는 개념이 소장님의 논지에서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좋은 규칙을 디자인하는 게 소장님이 해야 할 일이 아닌가 한다는 거지요. 소넷님의 질문에 대한 제 나름의 답변이 될 수도 있겠는데요.

김대호: 국가와 정치의 본령이 질서이고 질서는 정의이자, 게임규칙이죠. 게임규칙의 핵심 지주가 공정과 공평이죠. 규칙은 상위 개념이죠. 중국의 법가철학의 전통을 받은 것이니까

오돌또기: 지금 경제학의 최신 흐름을 보면, 좋은 규칙을 디자인해서 사회를 더 낫게 만들자는 연구가 활발합니다. 메커니즘 디자인도 그렇고 제도경제학도 그렇고 이번에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오스트롬이 하는 이야기도 그렇고 말이죠.

최근에는 신성장론으로 잘 알려진 폴 뢰머는 새로운 규칙으로 짜여진 신도시를 만드는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김대호: 그렇군요. 노무현의 원칙과 상식도 규칙과 비슷한데, 공정과 공평보다 좀 무딘 것 같잖아요?

sonnet: 하지만 반대로 구질서에 존재하는 선을 인정하지 않고, 악을 치유하고자 하는 열정에 골몰한 나머지, 기존의 선을 좀더 좋은 것으로 대체함이 없이 그것마저 파괴해버릴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개혁가는 자신이 주장하는 개혁에 대해 믿음이 과도한 경우가 많습니다.

오돌또기: 김소장님, 말씀하신대로 좋은 규칙은 상위개념이라고 봅니다.

김대호: 오스트롬과 폴뢰머 잘 살펴보아야겠네요. 저는 오히려 제 생각을 역사에서 찾는데 주력하고 있었는데

오돌또기: 소넷/ 물론 의도와는 다르게 의도하지 않은 비극이 발생할 수 있겠지요. 그러한 위험은 어떤 상황에서 무슨 행동을 하더라도 따르는 위험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지성으로 극복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하나의 예를 들자면, 위키피디아의 성공사례를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이게 좋은 규칙과 디자인의 성공사례지요. 위키의 핵심 규칙은 중립적인 논조입니다. 이걸 통해 그렇게 성공한 것이죠.

김대호: 오돌또기님 생각에 공감합니다.. 사실 남한과 북한도 규칙의 힘의 기념비적 사례 아닌가요

오돌또기: 김소장님, 폴 뢰머가 남북한을 딱 그래도 예를 들어 설명한 바 있습니다. 나중에 한 번 보시길. http://www.ted.com/talks/paul_romer.html

저는 그런 점에서 좋은 규칙에 보다 천착하시면 좋겠다는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이상)

### 대안이 되지 못하는 진보세력

*사회자: 사실 흐름이 약간 튀기는 합니다만, 김소장님은 발제문에서 진보정당이나 민주당이 '대안'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셨는데요, 김소장님의 현실 정당에 대한 입장이 궁금합니다. 좀더 구체적으로는 친노신당과 제1야당인 민주당에 대한 입장이 듣고 싶었는데요.

김대호: 얘기 길어질텐데 짧게 얘기하면 저는 문제의 핵심은 민주당을 포함한 진보가 SWING VOTER, 참여정부와 노무현에 대한 비판적이지만 한국사회의 진보와 개혁에 동의하는 사람들을 제대로 결집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친노신당도 민주당도 마찬가지구요. 합쳐서 40%를 얻는 솔루션은 있는데, 나머지를 얻는 솔루션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한나라당이 확 혁신해버리고, 범 보수가 이인제 탈당사태를 막으면 이길 방법이 없습니다. 결국 지하수 개발론자 입니다. 기존 정당의 적극적 지지자, 참여자를 지표수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하수는 지표수 보다 수량이 많습니다. 이들을 정치적으로 결집해야 합니다. 지금은 이들의 표심은 민주당 친화적이지만, 민주당의 독점에는 걱정을 많이 하죠. 그러면서도 소수 정당에 대한 배려심이 있습니다. 이들은 민주당, 친노신당, 민노당에 대해서 적극적 지지가 아닙니다. 바람, 감동, 기대가 없습니다. 그러면 40%를 잘 못넘깁니다. 조만간 제가 [희망과 대안]에 큰 제안을 하나 하려고 합니다. 그야말로 판을 흔들 수 있는.....(이상)

*사회자: 소넷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보수 입장에서 진보진영에 해주고 싶은 충고라면요?

sonnet: 지금까지 보면 두 가지 전략이 있는 것 같습니다. 김대중처럼 갈등을 좀 덮고 가는 타입과, 노무현처럼 wedge issue를 전면으로 내세우는 스타일.. 이 중에 어떤 전략을 택하느냐가 관건이 아닐까 싶네요.

김대호: 두 타입이 사실 하나인데.....김대중의 토대위에서 노무현이 자신의 매력, 가치로 추가해서 50%에 근접한 것인데....

오돌또기: 희망과 연대이건, 유시민이 중심이 된 친노신당이건 독자적으로 정권을 창출할 능력은 단기간에 생기지 않으리라고 봅니다.

sonnet: 노무현은 JP랑 같이는 일 못할걸요(웃음) 젊은 세대들이 열광한 게 그런 선명성이잖습니까.

김대호: 저는 희망과 대안에 정당적 역할을 하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큰, 정말로 중요한 역할이 있습니다.

오돌또기: 토론회 초반에 이야기가 오갔던 것처럼, 현행 선구제도는 양당제 + 소수야당 몇 살아남는 구조이구요. 문제는 어떻게 하면 흩어진 진보세력을 묶느냐인데, 소넷님의 말씀으로 이어지는군요 (웃음)

정리와 총평

*사회자: 세간티니님은 진보신당 지지자로써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세간티니: 음.. 사실 김대호 소장님의 말씀은 전반적으로 사민주의와 일치하는 부분이 많거든요. 예를 들어 연대임금제라든지 유연안전체제라든지요..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김대호님은 평소에 사민주의에 대한 레토릭적 거부감과는 달리 실제로는 광의의 사민주의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3의 길, 김대호 소장님의 노선과 비슷한 제3의 길도 따지고 보면 사민주의의 변용인 것처럼요

김대호: 토니블레어, 기든스를 사민주의자로 쳐주면 저도 사민주의자 입니다. 그런데 한국은 북유럽사민주의를 정통으로치고, 나머지를 신자유주의 아류로 여기는 것 같아 걱정입니다.

세간티니: 따지고 보면 북유럽 사민주의가 더 시장주의에 충실하다고 보여집니다만...

김대호: 그건 좀 아닌 것 같아요. 격차가 너무 작은 것은 시장과 거리가 멈겁니다. 제 노선이 일반 진보와 다른 것은 자유주의 개혁을 매우 중시한다는 것입니다.

*사회자: 소넷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sonnet: 김소장님은 개혁에 대한 신념이나 의지가 아주 강하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양한 분야의 개혁안을 꾸준히 제안해 주고 계시고, 또 그 배후에는 몇 가지 공통된 개념, 아까 말씀하신 공평의 개념 같은 것으로 일관성을 잡고 계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다소 철학적인, top-down한 접근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제가 대조적인 모델을 하나만 들면 작은 ad-hoc한 개혁들이 모여서 사회 디자인이나 대형 기획은 없지만 결과적으로 진화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그런 것과 반대되는 입장인 것 같습니다. 이상입니다.

오돌또기: 저는 이미 앞서 총평을 밝혔으니 그걸로 대신하구요. 하나만 덧붙이자면, 이명박의 서울교통체계 개혁이 새로운 그리고 좋은 규칙을 통해오늘 대화를 통해 김소장님의 생각을 좀더 생생하게 접할 수 있게 되어서 유익했습니다. 여기 모이신 분들도 아마 공감하실텐데, 김소장님이 개혁진보진영의 소중한 인적자산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좀더많은 활약을 기대해 보겠습니다.

세간티니: 아까 정당과 관련해서 총평을 말씀 드리자면
앞으로 중도좌파와 중도우파가 서로 힘을 합해서 정치개혁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유럽의 복지국가가 사실 기민당이나 드골 같은 보수정당의 적극적인 참여와 동의아래서 만들어졌거든요. 물론, 공산주의 위협에 대응하겠다는 목적이 있었지만 말이죠. 마찬가지로 지금 현재 한국에서도 수구세력, 혹은 시장원리주의 같은 외적 위협에 중도좌우파가 정책,선거연합을 통해서 만이 의미 있는 정치개혁과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김대호소장님의 이론적 접근은 서로 공통되는 부분이 많다고 여겨집니다. 사민주의 정치세력과 김대호 소장님의 공평이라는 개념은 서로 앞으로도 보완해가면서 좋은 정치철학으로 발전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상입니다

*사회자: 그러면 김소장님 말씀을 들을까요?

김대호: 세간티니님은 사실 처음처럼 느껴지고, 소넷님과 오돌또기 님은 글을 종종 읽었죠. 그런데 오늘 비로소 사귀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블로그나 멜을 통해서 좀 아는체 하겠습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리고 저는 30대 후반까지 정치.정책 담론을 붙잡고 세상을 살아갈 것이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의 생각은 철저히 귀납적으로 형성된 것입니다. 자동차 산업과 관련된 거대한 가치생산사슬이 저의 개념을 형성했다고 생각합니다. 연역적 방법과 귀납적 문제의식을 결합하게 된 것은 글쎄 한 5~6년 될까요? 세상을 바꾸려면 정치를 바꿔야 하고, 그럴려면 생각은 한 두 단어로, 몇 초안에 설명할 수 있어야 하고, 캐물으면 7박8일 동안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오늘 매우 흥미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첫경험이었습니다. 이런 방식의 토론도 참 괜찮다는 생각이 드네요. 저도 다른 데서 한번 써 먹어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직접 만나서 맥주 한잔 하면서 침 튀겨가면서 하면 더 좋겠다는 생각도 드네요. 초청에 감사하고, 좋은 기회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회자: 지금도 많은 분들이 미처 질문하지 못하신 것들이 많고 발언하지 못하신 의견들이 많이 있습니다. 미진했던 부분들은 아크로 게시판이나 패널분들의 블로그를 통해 더 깊이 있는 논의가 진행되리라 기대합니다. 오늘 토론회는 아크로에서 마련한 제1회 온라인 토론회 입니다. 첫 토론회이다 보니 진행에 미숙한 점도 있고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분들이 긴 시간 참석해주신 점 감사드리구요. 발표자 김소장님과 세분의 패널, 오돌또기님, sonnet님, 세간티니 님 오늘 수고 많으셨고 정말 감사드립니다.

*사회자: 그럼 이것으로 제1회 아크로 온라인 토론회를 마치겠습니다.
theacro-091101.doc

by 김대호 | 2009/11/03 21:39 | 정치와 통계 | 트랙백 | 덧글(0)

[희망과 대안]이 진짜로 희망과 대안이 되는 길

-天下三分之計-

                                                                                           

                                                                                  김대호(사회디자인연구소장)


대선, 총선, 지방선거 같은 큰 선거가 다가오면 정치판이 크게 요동친다. 정치인과 정치조직들의 이합집산, 간판 바꿔달기, 리모델링, 새로운 인물 및 정치세력(조직)의 등장 등이 그 대표적인 현상이다. 한국은 그 어떤 나라보다 국민들의 비판적 안목이 높다. 기대, 요구 수준도 높다. 경제, 사회 환경은 급변한다. 반면에 환경의 변화에 조응하여 제도와 리더십을 변화시킬 책임이 있는 정치는 둔감하고 무능하다. 그러다 보니 현실 정치권에 대한 불만이 팽배해 있다. 당연히 큰 선거가 다가오면 새로운 인물과 정치세력에 대한 기대가 분출한다. ‘혹시나’ 하는 기대가 ‘역시나’ 하는 실망으로 바뀌는 경험을 수십 년째 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정치(세력)에 대한 열망이 식지 않는다. 국민들의 고통, 불만과 기대, 요구가 잦아들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열망을 배경으로 1987년 이후 20여 년에 걸쳐 범 진보 인사; 재야.민주화 운동 출신 인사, 민중운동(노동.농민.빈민운동 등) 출신 인사, 시민운동 출신 인사들이 수혈이나 독자적인 정치세력화 등을 통하여 끊임없이 현실 정치권으로 들어왔다. 거의 실패하긴 했지만 종교(주로 기독교)에 기반을 둔 독자적인 정치세력화 시도도 끊이지 않았다. 최근 20년 동안 범진보(재야, 민중, 시민운동) 세력에 의해 이루어진 현실 정치 진출 시도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조직적인 시도는 민주노동당과 개혁당 실험 일 것이다. 그리고 현실 정치에 진출해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사람은 노무현, 이해찬, 유시민, 손학규, 송영길, 김문수, 오세훈, 이재오, 원희룡 등이 아닐까? 범 진보의 정치사회적 위신이 전반적으로 실추된 가운데 상대적으로 그 위신이 덜 실추된 존재가 바로 [희망과 대안]에 이름을 올린 시민운동 지도자들 일 것이다.

 

비어있는 거대한 정치공간

한편 2007년을 전후해서는 범 진보 운동과는 거리가 있는, 기업인 및 수도권 화이트 칼라(사무, 관리, 기술, 전문직, 예비 화이트 칼라=청년세대)의 사고와 정서가 이명박, 문국현, 손학규 등을 통해서 정치적으로 분출되었다. 이 민심은 2002년에는 노무현으로 크게 쏠린 흐름이었다. 2009년 현재는 이명박, 문국현 등의 실망스런 행보로 인해 어디론지 증발하였다. 정확히 말하면 정치적 대홍수를 일으킬 수 있는 거대한 먹장 구름이 되어 한국 상공을 떠돌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삼국지에 빗대어 얘기하면, 바로 이 계층이 촉나라를 건설할 수 있는 형주와 익주(서촉)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이 땅은 위나라에 비유할 수 있는 이명박과 한나라당이 진정한 중도실용을 실천하여도 차지할 수도 있고, 오나라에 비유할 수 있는 민주당이나 이른바 친노세력이 환골탈태하여도 차지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확률은 지극히 낮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지도자의 립서비스야 얼마든지 바뀔 수 있겠지만, 역사와 전통에 빛나고(?), 관성도 강하고 정치적 기득권도 큰 세력의 변신이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권력의 향배를 결정하는 Swing Voter(벤처중소기업가, 지식근로자)를 촉나라에 비유하다 보니 그 계층이 적게 느껴질지 모르겠다. 하지만 실제로 이들은 한국 사회의 물질적 문화적 생산력-여기에는 공정 경쟁(기회), 공평 보상, 투명 사회, 경제사회적 활력, 생산적 복지, 더 높은 수준의 민주주의 등이 포함된다-을 선도하기에 사회의 압도적 다수인 3비층(취약계층)의 이해와 요구도 가장 잘 대변한다. 요컨대 앞에서 말한 Swing Voter는 캐스팅 보트(Casting Voter)여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압도적 다수의 표심 그 자체이기에 중요한 것이다.

정치 지형이 이렇기에, 이 땅의 임자가 될 가능성을 비교적 많이 갖추고 있는 시민운동 지도자들의 정치 관여 시도가 주목 받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쨌든 범 진보 친화적 국민들은 [희망과 대안]을 기대 섞인 눈으로, 범 보수 친화적 국민들은 우려 섞인 눈으로 바라보았다. 후자의 우려는 창립 총회장에서 벌어진 극우 몰상식 노인들의 난동과 동아일보 등 극우 언론의 비난으로 표출되었다. 이는 최근에 출범한 범 진보 정치조직 혹은 준정치조직 창립식에는 없던 일이다. 시민운동의 새로운 시도가 그 객관적인 능력, 의도와 상관없이 정치판을 크게 요동치게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민운동의 오래된 관성과 [희망과 대안]의 창립취지문 및 운영원칙(안)을 보면 과연 범 진보가 기대하는 정치적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운 점이 좀 있다. 본론에 앞서 내 개인 얘기를 좀 하면, 사실 나는 삼십 대 후반까지만 해도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직업적으로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나는 사십 대 초에 또 한번 경계를 넘었다고 할 수 있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의 경계선을 넘나들다 보니 경계선의 이쪽과 저쪽 세계에 대해서 약간은 객관적으로, 상대화시켜 볼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넘나드는 세계는 대충 이렇다. 이공계-인문사회계, 블루칼라-화이트칼라, 엔지니어-사무관리직/CEO, Specialist-Generalist, 실천가-이론가, 현실정치-시민운동, 기독교-불교 등. 내 이념적 정체성도 형용모순적 언어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 좌파신자유주의, 우파사민주의, 전투적 중도주의 등.

 

협소한 관심 영역과 이상주의

시민운동과 현실 정치 사이에는 건너기 쉽지 않은 큰 강이 놓여 있다. 단적으로 시민운동은 자신이 중시하는 가치 한 두 개만 배타적으로 추구한다. 하지만 정치는 수많은 가치의 우선순위를 매기고, 모순된 가치들의 타협, 절충을 도모한다. 그래서 정치를 ‘서로 상충하는 수많은 이해관계를 합리적으로 권위적으로 조정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 아닌가? 이는 정치에 관여하려고 하는 시민운동 지도자들로 하여금 관심.학습 영역의 대폭적인 확장을 요구한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단적으로 한국 민주노조운동이 역사가 오래 됐고, 정책역량도 좀 있지만 그 기업의 경쟁력의 핵심을 쥐고 있는 화이트 칼라에 대한 이해는 일천하기 짝이 없다. 기업 경영에 대한 이해도, 금융 시장에 대한 이해도, 전후방 가치생산 사슬(협력업체)에 대한 이해도 마찬가지다. 이것을 좀 알았다면 쌍용차 노조가 그렇게 과격한 투쟁도 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게 비참하게 깨지지 않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노동 내부의 엄청난 분화와 격차에 대한 이해도, 노동을 넘어 3비층에 대한 이해도 일천하기 짝이 없다. 나는 관심의 폭과 깊이에서 노조운동과 시민운동이 그렇게 현격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시민운동은 상대적으로 다양한 계층을 만나고, 물질적 기득권도 별로 없기에 변신이 쉬울 뿐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시민운동이 이상주의적 잣대를 가지고 최선을 추구한다면, 정치는 차선 혹은 차악을 추구해왔다. 헌법개정에 대한 태도로 말하면, 정치는 주요 대권주자들의 정치적 이해관계나 정치세력간의 정치적 역관계 등을 고려하여 원포인트 개헌 혹은 권력구조에 국한된 개헌을 현실적인 최선으로 여긴다. 하지만 시민운동은 대체로 ‘충분한 국민적 숙의’와 정치적 이해관계를 배제한 이상적인 개헌을 요구한다. 선언적 의미 이상이 없는 헌법상의 기본권 강화에 집착하고, 개헌이 필요한 조항을 한꺼번에 다 개정하자고 한다. 정치적 역관계상 불가능한 진보적 색채가 짙은 헌법을 만들라는 요구도 빼놓지 않는다. 이는 선거법, 정치자금법, 정당법, 복지관련 법.제도 등에서도 비슷한 양상을 띤다. 물론 이것이 시민운동의 일반적인 모습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으로 명분을 중시해 온 한국인의 성정을 많이 빼 박은 한국 시민운동은 더 완강하게 명분과 원칙에 집착해 왔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좋게 말하면 빛과 소금의 역할에 충실한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현실의 실질적인 변화에는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한국 최고의 정치인으로 알려진 김대중 전대통령이 ‘정치인은 선비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한 것은 이상주의와 현실주의의 결합/조화가 정치적 승패의 관건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상인은 현실적이고, 계산적이고, 세속적이고, 약삭빠르고, 때론 교활한 존재이다. 오죽했으면 선비의 나라인 조선이 직업의 귀천을 士農工商 순으로 정했겠는가? 오랜 시민운동가처럼 선비적 성향이 강한 사람이 현실 정치에 대해서는 체질적으로 거부 반응을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내가 20대 초 중반에 보았던 그 많은 훌륭한 선배, 동료들이 현실 정치판에 거의 없는 것은 이 때문이 아닐까 한다.

 

후진적 국민층

시민운동이 건너기 힘든 큰 강은 이뿐 아니다. 시민운동이 국민들의 이상과 이성에 호소한다면, 정치는 국민들의 세속적인 욕망과 감성에 호소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시민운동이 호소하는 대상이 매우 이성적이고, 비판적이고, 교양 수준도 높은 선진적인 국민층이라면, 정치가 주요하게 의식해야 할 대상은 1인 1표인 이상, 지역주의(연고주의)나 비이성적인 공포에 현혹되고, 비현실적인 욕망을 가진 후진적인 국민층이다. 시민운동이 이상과 당위를 설파한다면, 정치는 재정적 제약, 유관 법.제도적 제약, 문화적 제약, 정치적 제약, 이른바 民度 등 오만 가지 제약 조건을 고려해서 해법을 내놓아야 한다. 정치가 후진적인 국민층을 주요하게 고려하다 보니 선진국 조차도 정치인에 대한 사회적 신뢰 수준이 바닥을 기는 것은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하물며 선진국에 비해 사회적 신뢰 수준은 더 낮고, (정치에 대한) 언론의 편파, 왜곡, 폄하도 심하고 시민단체와 국민들도 하나같이 명분에 집착해 온 한국 사회에서 정치인의 신뢰 수준이 바닥 중의 바닥인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게다가 아무리 독야청정 하려고 해도 박연차 같은 사람이 정치인의 코를 꿰려고 돈 뭉텅이를 들이민다. 정치 자금과 생활 자금을 조달할 길이 지극히 협소한 상황에서 이 유혹은 결코 물리치기가 쉽지 않다. 특히 가족들은! 또한 (문국현 재판에서 보았듯이) 검찰, 법원, 선관위 등도 권한 확대 차원에서 법을 매우 엄격하게 들이댄다.

 

한편 시민운동이 정치판으로 나오면 같이 하게 될 현실 정치인들의 상당수는 대체로 안면몰수, 뒤통수 때리기, 말 번복하기, 약속 뒤집기, 위에 올려 놓고 밑에서 흔들기, 헤게모니에 대한 비이성적 집착 등이 난무하는 현실 정치판에서 상처를 입은 사람이 많다. 따라서 심리와 행동이 정치 초보자와 같을 수가 없다. 살면서 보니 이런 저런 일로 크게 상처받은 사람의 심리와 행동이 뒤틀리지 않는 경우를 별로 보지 못하였다. 하지만 그 때문에 현실 정치 경험자들을 물리치고, 순결한(?) 사람들끼리 정치하려면 문국현처럼 형편없는 정치를 하기 마련이다.

 

정치 하지마라

이래저래 한국 시민운동 지도자와 한국 정치지도자 사이에는 선진국 보다 훨씬 건너기 힘든 큰 강이 가로 놓여 있다고 보아야 한다. 지난 3월 4일 故노무현 대통령이 쓴 ‘정치 하지 마라’라는 글은 그 큰 강의 존재를 말해 준다.

 

“‘정치, 하지마라.’ 이 말은 제가 요즈음 사람들을 만나면 자주 하는 말입니다. 농담이 아니라 진담으로 하는 말입니다. 얻을 수 있는 것에 비하여 잃어야 하는 것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정치를 하는 목적이 권세나 명성을 좇아서 하는 것이라면, 그래도 어느 정도 성공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성공을 위하여 쏟아야 하는 노력과 감수해야 하는 부담을 생각하면 권세와 명성은 실속이 없고 그나마 너무 짧습니다. 이웃과 공동체, 그리고 역사를 위하여, 가치 있는 뭔가를 이루고자 정치에 뛰어든 사람이라면, 한참을 지나고 나서 그가 이룬 결과가 생각보다 보잘 것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중략) 정치를 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정치에 바쳐야 합니다. 정치를 위하여 무엇을 바쳐야 하는지를 헤아리는 것보다, 그가 가진 것 중에서 정치에 바치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를 헤아려 보면,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사생활, 특히 가족들의 사생활을 보호할 수 없는 것은 참으로 치명적인 고통입니다. 그러나 이 정도까지는 스스로의 선택이니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문제는 정치인이 가는 길에는, 미처 생각하지 않았던, 그리고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운 난관과 부담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거짓말의 수렁, 정치자금의 수렁, 사생활 검증의 수렁, 이전투구의 수렁, 이런 수렁들을 지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좋은 조건을 가진 정치인이 아니고는 이 길을 회피하기가 어렵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수렁에 빠져서 정치 생명을 마감합니다. 살아남은 사람도 깊은 상처를 입은 사람이 많습니다. 무사히 걸어 나온 사람도 사람들의 비난, 법적인 위험, 양심의 부담, 이런 위험 부담을 안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말년이 가난하고 외롭습니다"

 

한국에서 시민운동 지도자들이 정치를 한다는 것은 기독교 식으로 말하면 이 시대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그만큼 절실히 필요하고도 고통스러운 일이라는 것이다.

 

범 진보의 빈 구석 채우기

다 아는 얘기지만 정치는 망가질 각오를 한다고 해서, 또 열심히 한다고 해서 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참여정부, 열린우리당-대통합민주신당, 민주노동당 등이 열심히 안 해서, 혹은 까마귀 노는 곳을 백로들이 회피해서 오늘날의 문명역주행 사태가 도래한 것이 아니다. 핵심 패인은 국가경영 실력(컨텐츠, 리더십, 조직) 부족이다.

 

지난 몇 년간은 참여정부, 열린우리당,통합민주당,민노당 등 현실 정치권만 떡수를 둔 것이 아니다. 시민단체, 진보 언론, 진보 지식사회 등 범 진보 전체가 이로부터 자유롭지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몇 년간 범 진보를 분열과 대립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은 주요한 정치적 쟁점-지난 대선, 총선 평가, 참여정부, 열린우리당, 민주노동당 등의 행보에 대한 평가 등-에 대한 깊은 성찰도, 튼실한 합의도 없다.

 

담론 측면에서만 봐도 시민운동을 포함한 범 진보가 결여한 담론이 한 둘이 아니다. 예컨대 박정희 패러다임과 김대중 패러다임을 넘어선 새로운 경제사회 패러다임(플랫폼)이 없다. 이렇게 보는 것은 (현실 정합성은 없어도) 나름대로 논리적 정합성을 가지고 있는 북유럽 경제사회 패러다임을 대안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범 진보 특유의 일자리/산업/중소기업 정책도 없다. 일자리 정책은 대체로 복지 정책의 결과로 다뤄진다. 이는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기고, 부자에게 혜택을 많이 주면 일자리도 많이 생기고, 빈자의 소득도 올라간다는 얘기처럼 헐렁하다. 또한 이명박, 오세훈, 김문수가 재미 보고 있는 국토/수도권/서울을 대상으로 한 공간 디자인 전략도 없다. 진보 특유의 공공부문 개혁 담론도 없다. 증세, 공공부문 확대, 구조조정 반대가 주다.  헌법, 선거법 등 정치관계법 개혁 방안도, 사법개혁 방안도 이렇다 할 것이 없다. 업그레이드 된 균형발전(지방발전) 정책도 나올 때가 됐지만 없다. 단지 세종시 원안 사수가 전부처럼 되었다.

그리고 좋은 정치의 기초인 미래학(인구, 재정, 교육, 산업/기술, 기후.환경.에너지.자원 등)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너무나 취약하다. 교육, 보건 의료, 복지, 노동 등에서는 좌파적 담론은 무성하지만 범 진보의 정책적 컨센서스는 잘 형성되지 않는다. 범 진보가 대체로 공유하는 정책적 컨센서스는 대북 화해협력 정책뿐인 것처럼 느껴진다.

 

이렇듯 시민운동이 의미 있는 정치세력이 되기 위해서 건너야 할 강은 너무나 크고, 넘어야 할 산은 너무나 험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시민운동이 이 강을 건너야 하고 이 산을 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희망과 대안] 창립선언문에서 말했듯이 ‘이 위기의 상황에서 국민이 기대고 의지할 곳은 아무데도 보이지 않고, 민주당이나 다른 야당들이 국민의 지지를 받을 만한 제대로 된 대안이나 전망을 내놓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절망적 상황은 시민운동으로 하여금 정치의 변화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라는 점을 깨닫게 하고 있으며, 단순히 특정 정당 정파에 대한 반대나 지지가 아니라 한국 민주주의를 한 단계 더 높이고, 더 심화시키기 위한 도전에 나서야 한다는 절박감을 던져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적 요구 외에도 기대를 버릴 수 없는 것은, 아무리 약점이 많아도 시민운동과 그에 친화적인 세력들이 비어있는 거대한 정치 공간을 차지할 가능성을 비교적 많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시민운동은 공직에 선출되면 좋고, 설사 선출되지 못해도 공적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조직(시민단체)과 마인드가 있기 때문이다. 선출직 공무원 배지를 달지 않으면 공적 가치를 실현하는 데 잼병이고, 일상 정치활동이래 봤자 (팬클럽, 정당, 언론사 등) 홈페이지에서 키보드 두드리는 것 전부인 취미가 ‘정치 관여’인 사람들이 넘쳐나는 상황에서 이는 너무나 소중한 자산이다. 

 

[희망과 대안]이 모든 제약 조건을 극복하고 진짜로 범 진보의 희망과 대안으로 거듭나 주기를 기대한다. 이 관건은 한국 정치, 좁게는 범 진보 정치가 결여한 부분을 채울 수 있는 안목과 실력일 것이다. 그 출발은 한국의 열악한 정치 현실에 대한 깊은 이해가 아닐까? 知彼知己아닐까? –끝-

by 김대호 | 2009/10/28 19:07 | 정치와 통계 | 트랙백(1) | 덧글(10)

[희망과 대안] 창립 총회 참가 소감

 -연합정치에 대한 적극적 역할을 기대하면 안되나?-

 

                                                                       김대호(사회디자인연구소장)

 

창립총회는 10 19일 오후 3시 조계사 한국불교역사문화관에서 열렸다. 백낙청 선생의 인사말이 끝나고, 영상 자막으로 희망과 대안회원 소개가 시작되었다. 그러자마자 자칭 대한민국어버이연합회원을 자처하는 노인 70여명의 난동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자리에서 우르르 일어나 삿대질하면서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댔다. "애국가도 없이 태극기도 걸지 않은 채 진행하는 행사가 도대체 어딨냐" "너희들이 6.25 전쟁을 아느냐" "대한민국 국민이 맞느냐" "10년 속은 것도 억울한데 너희들이 또 정치를 하겠다는 것이냐"가 주 메뉴였다. 몇몇은 태극기를 흔들고, 애국가를 부르기도 하였다. 이들은 대회 방해 자체가 목적인 것이 분명했다. 세상에서 가장 곤혹스러운 존재가 배 큰(엄청 먹어대는) 애와 사나운 노인네라고! 정말 대처하기 곤혹스러웠다. 시간이 흘러도 진정이 되지 않자, 사회자와 진행요원들은 참석자들에게 강당에서 빠져나갈 것을 요청했다. 참석자들이 몽땅 빠져나가고 노인 훼방꾼만 남게 되자, 이들은 무슨 고지라도 점령한 듯 강당에서 대한민국 만세를 수 십 번도 더 불렀다. 감격과 승리의 만세였다. ‘좌익들 회의를 무산시켰다면서! 물론 이 엽기적인 장면은 오마이뉴스 등을 통해 생중계 되었고, 진보 언론에서는 주요하게 다뤄졌다. 나중에는 주최측의 신고를 받은 경찰도 몇 명 왔다. 몇몇 주동 급 노인네는 진행요원들이 붙잡아(끌고 가서) 경찰에 넘겼다.

 

이명박 정권과 조중동 등 보수정치 세력이 아무리 후지다고 해도 이런 수준의 난동을 부추기거나 지지할 리가 없다. 이는 보수에게 혐오감을 조성하기에 딱 좋은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에는 공권력과 여론의 눈치를 보던 보수의 퇴행적인 존재들이 이젠 이 정도 망동은 용인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실제 조중동의 보도 태도-함구하거나 축소 보도-를 보면 이 자들이 그렇게 생각할 만하다는 느낌이 든다. 바로 이것이 무서운 것이다. 실제 다양한 층위에서 자칭 보수의 우후죽순처럼 솟아나고 있다. 

 

가장 힘센 존재들은 엄청난 재정적자와 통화량 팽창과 적당한 (재정)분식회계 등을 결합해서 경기지표, 재정지표를 좋게 보이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미래를 털어 먹는다. 그 아래서는 불요불급한 토건사업(예컨대 4대강 사업 등)에 기대어 수십 조원의 재정을 털어 먹는다. 그 아래서는 각종 처벌권, 규제권, 촉진권을 지렛대로 해서 재주 것 해먹는다. 은행이나 기업을 압박하여 각종 기금이나 재단(예컨대 미소금융 재단)이나 협회를 만들어 그 운영권을 꿰 차는 것은 고전적인 수법이다. 말초 중의 말초에 해당되는 아파트 입주자 회의에서도 과거에는 용인되지 않았던 반칙, 변칙이 고개를 치켜든다. [희망과 대안] 창립 총회장에서 벌어진, ('서북청년단'의 정서를 이어받은) 서북 노인단(?)’의 난동은 정권 교체를 계기로, 다양한 층위에서 고개를 치켜드는 보수의 반민주 몰상식 폭란의 하나이다. 빙산의 일각인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억울한 죽음과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이 지금 어디쯤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 아닐 수 없다.

 

[희망과 대안] 창립 총회장에 간 것은 초대를 받아서가 아니다. 몇 년 째 사회디자인연구소 간판을 달고,  진보의 혁신을 통해서 희망과 대안을 찾는 노력을 나름대로 치열하게 기울여 온 사람의 하나로서, 우리가 부여잡은 시대정신을 이름으로 박은 단체의 창립 총회였기에 간 것이다. (창립 총회의 핵심 구호 내지 부제가 한국사회의 새로운 미래를 디자인 합니다였다) 또 하나, 민주당, 민노당 등 여러 정당과 정치조직에서 도통 희망도, 대안도 찾기가 힘들어서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간 것이다. 솔직히 나는 국민참여, 시민주권, 민주통합시민행동 보다 '희망과 대안'이 시대정신을 비교적 잘 받아 안은 말이라고 생각한다.

 

경과보고와 창립선언문과 운영원칙()과 회원들의 면면을 훑어보았다.

 

이 위기의 상황에서 국민이 기대고 의지할 곳은 아무데도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민주당이나 다른 야당들은 국민의 지지를 받을 만한 제대로 된 대안이나 전망을 내놓고 있지 못하며, 시민운동 또한 개별화되고 관성화된 운동으로 국민과 소통하지 못하고 민주주의의 근간이 흔들리는 것을 막아내지 못했다고 한다. ‘절망적 상황은 시민운동으로 하여금 정치의 변화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라는 점을 깨닫게 하고 있으며, 단순히 특정 정당 정파에 대한 반대나 지지가 아니라 한국 민주주의를 한 단계 더 높이고, 더 심화시키기 위한 도전에 나서야 한다는 절박감을 던져주고 있다한다. 전적으로 공감이 가는 진단이다.

 

그러면 [희망과 대안]은 어떤 행보를 하려고 할까? 창립선언문은 이렇게 말한다.

 

시민운동은 우리 사회가 방향과 중심을 잃어버린 상황에서, 개별적인 노력을 넘어서서 국민에게 위안과 희망의 깃발이 되는 사회적 메시지를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풀 뿌리 운동의 성과에 기초해 정치를 아래에서부터 바꾸어나가며(중략) 우리 사회의 새로운 세력이 움트도록 돕고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한걸음 더 진전시킴으로써 변화를 일구어 내야 합니다(중략) [희망과 대안]은 시대를 고민하고 변화를 꾀하는 모든 세력들을 이어가는 거멀못이 되고자 합니다. 지금 절실한 정치.사회적 구심을 만들어 가는데 밑거름이 되고자 합니다

 

전체 1페이지 총 10개항으로 정리된 운영원칙()을 보니 첫머리에 있는 내용이 [희망과 대안]‘100여명의 회원으로 구성하며, 창립 이후 회원의 가입은 회원의 추천과 운영위원회의 승인을 거쳐서 결정하며, 회원 모두가 의사 결정과정에 참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중요한 의사결정은 전체 회의를 통하여 하며, 의사 결정은 합의제 정신을 기본으로 한다 어 있.

 

이로 미루어 보면 다른 정당, 시민주권 모임, 민주통합시민행동 등과 달리 [희망과 대안]은 회원 확대 의지가 거의 없다. 또한 정치적으로 예민한 문제는 거의 다룰 수 없고, 정치적 파장이 큰 행보 역시 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물론 시민사회의 사정으로 미루어 이는 충분히 납득이 가는 일이다. 따라서 현재의 조직 구조와 합의 수준(운영원칙)으로 보면, 내년 지방선거 시기에 어느 당에도 소속되지 않은 괜찮은 후보에게 시민 후보라는 딱지(품질 인증)를 붙여주는 일이 정치적 행동의 최대치가 아닐까 한다. 정책을 강조하고, 괜찮은 정책을 얘기하겠지만, 아마도 그 정책을 받지 않을 정당은 진보개혁 진영에는 없을 것이다. 거칠게 말하면 [희망과 대안]이 표방한 문제의식 및 포부와 실제 할 수 있는 사업은 상당한 모순 관계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당연히 창립선언문의 문제의식과 담대한 포부로 보면 [희망과 대안]회원들도, 이 조직에 관심과 기대를 가지고 바라보는 시민들도 이 정도의 정치적 역할에 만족할 것 같지가 않다. 나도 마찬가지다. 나는 [희망과 대안]이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해주기를 바란다. 현재의 조직으로 그 역할을 할 수 없다면, 그 문제의식및 포부를 구현할 수 있는 별도의 조직을 만들어서라도 그 역할을 했으면 한다.  알고도 안한다면 무책임한 사람이다

 

내가 감히 말하건대 지금 진보개혁 진영의 핵심 문제는 이런 것이 아닐까 한다.

첫째, 현실적으로 제반 정치조직들의 확장성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즉 토니 블레어, 고든 브라운이 주도한 영국 노동당 식의 혁신을 연출할 수 있는 이념적, 정치적, 문화적 역량이 그 어느 정치조직에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연히 기존 정치조직의 대중적 기반(민주당의 호남향우회, 민노당의 노조원 등)과 조직 문화를 크게 변모시킬 만한 새롭고 건강한 대중세가 보이지도 않고, 있다 하더라도 이들이 기존 정치조직에 들어갈 것 같지가 않다.

 

둘째, 지구상에는 강.호수에 흐르는 물(지표수)보다 지하수가 100배 이상의 수량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는 한국의 정치 역량에도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기존 정치조직으로 결집되어 있는 역량보다 훨씬 많은 역량이 마치 지하수 형태로 한국 사회 저변을 흐른다고 생각한다. 물론 시민단체 혹은 시민사회 지도급 인사들은 이 지하수의 일부 일 것이다. 한국 진보개혁 진영이 반역의 역사를 끝장내려면 수량도 많고 수질도 좋은 이 엄청난 지하수를 퍼올려 강을 만들고, 이 강이 수량과 수질이 변변찮은 기존 지표와 합류하지 않고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이 엄청난 지하수를 개발할 역량이 기존 정치조직에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셋째, 민주당, 민노당, 진보신당, 창조당, 국민참여정당(), 시민주권모임 등 제반 정치조직의 연합 정치가 절실히 필요한데, 이를 구현하기가 너무나 힘들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민주당에 김대중 같은 지배 주주가 있다면 수혈을 하든, 지분(공천권 등)을 조금 떼어주는 방식으로 연합정치를 구현할 수가 있다. 그러나 지금 민주당에는 그런 지배 주주가 없다. 그러므로 민주당 지도부가 기득권 양보 등을 통한 통큰 연합정치를 안하는 것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못한다고 보아야 한다.

 

반면에 민노당, 진보신당 등은 이번 선거에서는 득표를 얼마 못해도, 이를 발판으로 다음에는 더 많은 득표를 하고, 동시에 당의 위상을 점진적으로 올릴 수 있다는 확신이 거의 사라졌다. 몇 번의 선거를 거치면서 실탄도 탕진하고, 고령화되고(젊은 세대가 인입되지 않고), 현실의 높은 벽을 실감하면서 오랫동안 못 먹어도 고!’를 불러대게 만든 낙관적인 전망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는 (역량에 비해 너무 과도한 요구를 하므로 서 연합정치를 사실상 거부한) 소수 정당들로 하여금 연합정치에 전향적으로 나서게 하는 심리적 토양이 아닐 수 없다.

 

[희망과 대안]으로 상징되는 시민사회에 너무 큰 기대를 하는지 모르지만, 나는 시민사회가 엄청난 지하수를 분출 시킬 수 있는 구멍 몇 개를 뚫을 수 있는 가능성을 비교적 많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단적으로 이념적 혁신이 상대적으로 용이하다. 정치적 책임 내지 지난 시기의 정치적 업보로부터도 자유롭다. 무엇보다도 정치적 기득권에 집착하는 사람이 없다. 선수(후보, 특히 광역후보)로 나설 사람은 적어도, 공정한 심판을 볼 사람은 많다. 선대위원장 내지 선대위 고문을 할 사람도 많을 지도 모른다. 이는 시민사회의 치명적 약점으로 지목되어 왔다. 그러나 창립선언문에서 강조한 거멀못역할의 시각에서 본다면 약점이 강점으로 될 수도 있다.

 

요컨대 [희망과 대안]으로 상징되는 시민사회가 아직 정치화 되지 않는 역량을 많이 결집한다면, 즉 한국 사회의 저변에 흐르는 정치적 지하수맥을 좀 개발한다면, 그래서 대중적 지지세가 높다면 연합 정치를 주도하기에 최상의 조건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대중적 지지세는 높은데 후보를 탐하는 사람이 적어야 연합정치를 주도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좀 속되게 비유하자면 민주당이 코리언시리즈에 진출한 1위 팀이라면, 나머지 정파들은 [희망과 대안]으로 상징되는 시민사회의 심판 하에 플레이오프 전을 벌인 후 어떤 곳에서는 동일한 심판 하에 코리언시리즈를 벌이고, 그것이 필요 없으면 따로 따로 나가는 그런 구도 말이다. 물론 정치공학 보다 중요한 것은 진보의 철학, 가치, 비전, 정책의 혁신 일 것이다. 이는 열린우리당, 참여정부, 대선, 총선 등 지난 시기 제반 정치조직 및 시민사회의 주요 정치.사회 활동에 대한 깊은 성찰 없이는 안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1987년, 1997년, 2002년을 계기로 만들어진 민주, 진보, 개혁의 짙은 그늘을 대중의 눈으로 냉철하게 직시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현실 권력을 잡아 맘껏 휘두르려는 욕망은 약해도, 대의 명분에 대한 집착이 강한 시민사회 지도급 인사들의 적극적 역할 없이는 거꾸로 도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멈출 길이 없어 보인다.  너무 순진한 생각이라는 느낌은 들지만 달리 방도가 없어 보인다.--
http://www.goodpol.net/discussion/progress.board/entry/261

by 김대호 | 2009/10/22 06:43 | 선거,정당 비평 | 트랙백 | 덧글(0)

너무 중요한 문제제기-2010예산안 심의를 바라보는 관전 포인트

펌글입니다.사회디자인연구소 홈피http://www.goodpol.net/discussion/progress.board/entry/256
에 게시된 글입니다. 너무 중요한 문제제기라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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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위기가 시작되었다 - 2010예산안 심의를 바라보는 관전 포인트

  

정 창수(전 함께하는 시민행동 예산감시국장, 현 사회디자인연구소 전문위원)

 

슘페터는 ‘국가의 예산을 알면 국가의 미래가 보인다’고 했다. 이토록 중요한 2010년 예산안이 제출되었다. 이에 예산을 바라보는 몇 가지 관전 포인트를 제시한다.

  

1. 빚으로 회복한 지지율

현 정권의 지지율이 50%에 이르렀다. 정권퇴진 위기로까지 몰렸던 촛불시위 당시와 비교해본다면 믿기지 않는 결과이다. 상황이 변화한데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는 막대한 재정지출이다. 작년과 올해 우리정부는 공식적으로만 68조의 국가채무를 증가시켰다.

이는 우리나라의 GDP(국내총생산)이 900여조 정도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7%가 넘는 규모다. 여기에 보이지 않는 재정지출확대, 예를 들면 공공부분의 지출확대, 그를 위한 보증채무나 특수채, 등을 감안하면, 최소한 백조 이상의 재정지출이 이루어졌다는 것이 관련 전문가들의 예상이다. 결국 현재의 지지율 회복의 비결은 ‘빚’인 것이다. 우리는 전세계의 금융위기가 빚으로 경제성장률을 높인 착시현상 때문이었다는 점을 되새겨 보아야 한다. 또한 현실의 어려움을 숫자만의 성장으로 극복하려 한다면, 또 다시 오직 성장이라는 ‘욕망의 늪’으로 빠져버리게 될 것이다. 이러한 착시를 벗어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어야 한다.

  

2. 예산싸움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최근 국민들 사이에서 예산에 대한 관심이 과거 유래를 찾기 힘들 정도로 매우 높아지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국가채무 때문만은 아니다. 당장 체감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국가채무가 GDP의 230%를 넘어서는 세계최대의 채무정부인 일본도 국민이 이제야(?) 정권을 교체했다.

진짜 원인은 ‘진정한 예산싸움’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과거의 우리 예산은 점증주의적으로 증가해왔다. 일부 ‘몰아주기 예산’이 있었지만, 주된 관심은 항상 커지고 있는 ‘파이’를 누가 더 많이 차지하느냐에 있었다.

하지만 대규모 감세로 인해 상황이 달라졌다. IMF외환위기 당시에는 지출도 같이 줄였고 위기의식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4대강 예산’이라는 핵폭탄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단군 이래 최대 국책사업이라 했던 경부고속철도 사업이 18조 4천억원(당초 5조원)정도였다. 하지만 20여년에 걸쳐 진행되었다. 그러니 4년간 22조 2천억원이 들어갈 4대강의 규모는 비할 수 없다. 더구나 각종 설계변경으로 예산이 계속 증가할 것이다. 결국 한나라당에서까지 4대강예산에 대한 성토가 나오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자신의 지역구의 예산을 빼앗기게 생긴 것이다. 더 많이 얻기 위한 싸움보다 더 뺏기지 않으려는 싸움이 더 치열할 수밖에 없다.

  

3. 실탄이 떨어지고 있다.

문제는 현재 정부의 실탄이 떨어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정부는 본예산 외에 많은 실탄들이 있었다. 첫째는, 높은 세수증가율에 힘입은 세계잉여금 즉 ‘더 걷힌 세금’이 있었다. 둘째는 각종연기금의 여유재원들이다. 셋째는, 국가예산에 잡히지 않는 공기업 및 정부관련기관들의 예산이다.

그런데 작년부터 세계잉여금이 거의 사라졌다. 대규모 감세 등으로 인해 2007년 16조에 달하던 잉여금이 6조로 줄어들어 예비비의 잉여금등을 제외하면 사실상 남은 돈은 없다. 그래서 눈길을 돌린 것이 각종 연기금의 여유자금과 공기업 부분이다. 최근 수자원공사와 가스공사 등으로 예산 떠넘기기가 진행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공기업의 상황은 매우 심각하다. 아래의 표처럼 노무현 정부 전체 기간 동안 늘어난 공기업부채보다 지난1년 부채증가가 거의 맞먹는다. 공기업의 수익성을 감안하지 않는 정부의 무리한 재정지출 특히 토건사업의 예산이 숨어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러니 4대강사업이 시작된 2009년 올해의 예산이 포함되면 그 규모는 더욱 급증할 것이다. 결국 남은 실탄은 연기금의 여유재원이다.

7월에 나온 녹색성장위원회의 ‘녹색투자촉진을 위한 자금유입활성화방안’이라는 보고서를 보면 사회기반시설에 대한 민간투자법을 개정하여 연기금의 참여를 촉진시킨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바야흐로 미래의 실탄마저 쓰려는 것이다.

 

공기업총자산현황(단위 : 조원)

 

2004

2005

2006

2007

2008

자산

192

214

240

267

309

부채

88

99

118

138

176

자본

104

115

121

129

132

*예산정책처 “2009년 국가주요 쟁점사업”

 

4. 숫자들에 가려진 투명성

“세상에는 세 종류의 거짓말이 있다. 거짓말, 새빨간 거짓말, 그리고 통계”마크 트웨인은 영국의 수상 디즈테일리의 말이라면서 한 풍자이다.

2010년 예산안도 마찬가지이다. 정부는 공식적으로 총지출이 2.5%증가했다고 밝히고 있지만 이는 금융이기 이전에 책정된 본예산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추경기준으로는 3.3%감소했다. 아마도 재정축소라고 발표될 경우 출구전략 등 경기에 부정적인 영향을 염려한 듯하다. 하지만 이런 왜곡은 정부에 대한 불신만을 키울 뿐이다.

 

2010년 정부예산안 

 

’09

’10안

(B)

 

증감률

(B/A)

본예산(A)

수정

추경

◇ 총지출

284.5

293

301.8

291.8

2.5

ㅇ 예 산

204.1

217

210.3

202.8

△0.6

ㅇ 기 금

80.4

94

91.5

89.0

10.6

* 정부예산보도자료 등에서 재구성

 

한 가지 더 우려스러운 점 앞의 표에서도 보여주듯이 또다시 추경예산 등으로 예산을 증가시킬 것이 예상된다는 점이다. 평시에도 항상 있어왔듯이 추경예산을 통한 예산증액의 유혹을 더욱더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꼭 필요한 예산을 일부러 적게 책정하는 예산전략이 쓰일 가능성이 높다. 예를 들면 빈곤층예산을 모자라게 책정하면 어쩔 수 없이 야당등도 예산증액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악용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정부의 투명성은 중요한 의무이다. 투명성은 자료를 내놓는 것뿐만 아니라 접근성과 편의성이 수반되어야 한다. 일반 국민이 알아보기 힘든 자료는 공개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5. 임박한 재정위기-국가채무

1995년 OECD국가의 국가채무는 GDP평균 70.2%였고 2006년도에는 77.1%로서 크게 증가하지 않았다. 이중 큰 폭의 변화를 보인 나라가 일본과 한국이다. 일본은 87%에서 179%로 한국은 5.5%에서 27.7%로 증가했다. 최근 일본은 230%를 넘어섰다는 보고서가 나오고 있다. 재정개혁을 부르짖은 하토야마 총리도 또다시 채무확대이야기를 꺼내 논란이 일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의 부채가 계속 급증한 이유는 IMF외환위기로 인한 공적자금과 통화안정을 위한 외평채의 꾸준한 증가 때문이다. 하지만 2007년과 2008년은 공적자금의 국채전환이 종료되었고, 수십조의 세계잉여금 때문에 국가채무가 잠시 낮아졌다.

하지만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러한 여유자금의 부족으로 채무가 급증, 정부의 주장대로라도 올해만 58조가 증가하고 앞으로도 4년간 127조의 증가가 예상되고 있다.

문제는 우선, 이 기준마저 지나치게 낙관적이라는 것이다. 당장 내년도인 2010년의 경제성장률을 민간연구소들에서는 3%대 이하로도 추정하고 있는 현실에서 그 이후의 통계는 신뢰하기 어렵다.

둘째, 채무의 기준이 모호하다는 점이다. 최근 이한구의원은 국가부채가 넓은 의미로 1439조원(2008)에까지 이른다고 주장했다. 또한 옥동석교수(688조원,2007), 예산정책처(1281조,2007)라는 주장도 있다. 물론 국민연금납부금을 부채로 포함시키는 등 논란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새로운 기준’에 대한 공론화 작업을 국회에서부터 진행해야한다.

  

연도별 부채상황 

 

‘02

‘06

‘07

‘08

’09(추경)

’10

’11

’12

’13

실질성장률(%)

7.0

5.1

5.0

4.2

△2.0

4.0

5.0

5.0

5.0

국가채무(조원)

133

282

298

308

366.0

407.1

446.7

474.7

493.4

(GDP 대비, %)

18.5

31.1

30.7

30.1

(35.6)

(36.9)

(37.6)

(37.2)

(35.9)

정부보도자료(2009.9.28) 재구성

 

6. 복지증가 프레임

예산을 거론하면 항상 논란이 되는 부분이 복지예산이다. 복지예산의 비중이 제일 크며 계속 증가하고 있다는 논리이다. 이는 복지지출을 감소시키기 위해 항상 중요한 논거로 내세우고 있는 팩트(fact)이다. 하지만 그 내역을 들여다보면 많은 특이한 점이 발견된다. 복지예산에는 공적연금(국민,공무원,군인,사학), 보육예산, 노동, 주택은 물론 보훈예산까지 포함되어 있다. 실제 전체 81조원(2010예산)중에서 복지부 예산은 31조이며 이중 국민연금 등 기금을 제외하면 19조에 불과하다. 이중 기초생활수급자 예산만 7조2천억원에 이른다. 따라서 복지분야 중 가장 많은 예산은 공적연금으로 25조에 이른다.

내년증가분 중에서도 국민연금지급액(1.5조), 공무원․사학․군인연금(0.7조), 기초노령연금(1.3조)등 제도적 증가분이 3조원에 달한다. 이외에도 보금자리주택 융자금 2.6조원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 물가인상이나 자연증가분 등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실제로는 오히려 5조원 이상의 복지예산이 감소되었다고 보여진다.

 

7. 지방재정의 위기

최근 예산정책처 자료를 보면 MB정부 5년간 지방재정이 30조원이 감소한다고 한다. 감세는 중앙보다 지방에 더 취약하다. 중앙은 국채라도 발행하지만 지방은 그것도 여의치 않은데다가, 중앙재원에 대한 의존도가 높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부세만 10저원가량이 세수감소가 예상된다. 더구나 이 세수감소가 모든 지역에 균등하게 부담되는 것이 아니라 재정여건이 어려운 곳에 집중되기 때문에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최근에는 소비세의 5%를 지방소비세로 하자는 의견도 나오고 있지만, 오히려 지역별 불균형을 더욱 악화시킨다는 반론이 많다. 따라서 악화된 지방재정이 지역의 그 나마의 안전망을 얼마나 악화시키는지 이 부분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

 

8. 과거예산이냐 미래예산이냐

미국 클린턴 행정부 당시 사실상의 두뇌집단 역할을 한 진보정책연구소에서는 보고서를 통해 예산을 과거예산, 현재예산, 미래예산으로 분류하여 분석하였다. 과거예산이란 재정적자로 인한 부채 등 과거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지출이고, 현재예산은 국방비 공무원인건비 사회보장비 등 현재의 소모성 지출을, 미래예산은 교육과 직업훈련, 연구개발등에 투자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어떠할까? 아무래도 교육과 직업훈련에서는 조직의 유지 및 관리 등 현재 예산정도에 머물러 있는 것이 대부분이고 연구개발도 우주항공, 자동차 등 대기업 중심인 경우가 많다. 내년 산업․중소기업․에너지 분야가 무려 6조나 감소했다고 하니, 아마도 약한 중소기업예산의 대폭감소가 예상된다. 따라서 위기를 기회로 삼아 과감히 미래를 위해 투자하는가 아니면 현상유지에 급급하여 미래에 짐을 떠넘기는가 하는 것이 이번 예산심의에서 중요한 관전 포인트가 되어야한다.

 

9.법과 원칙을 지켜내는가

2008년과 2009년은 위기를 이유로 예산관련 법과 제도가 무력화 되었다. 따라서 역설적으로 재정건전성을 진보개혁세력이 주장하게 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현재와 같이 재정의 숫자의 암호로 감추고 폭탄돌리기를 하는 상황에서 역할이 뒤바뀐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일부 진보진영은 재정건전성에 초점이 맞취질 경우 신자유주의 진영에 말려 들것이라는 우려를 하고 있다.

   

10. 2010년은 재정위기론이 본격화되는 해

예산심의는 결산을 포함하고 있다. 대부분의 경우 결산은 지나간 일이라 하여 관심을 두지 않는다. 하지만 결산이야말로 정치적으로 포장되고 감추었던 예산의 허구와 문제점이 적나라하게 나타나는 평가의 장이다. 작년까지는 이전 정권의 상대적인 재정건전성 덕분에 여유가 있었던 데다가, 금융위기가 본격화되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나마 나았지만, 감세가 본격화되고 마이너스 성장에다가 과도한 재정지출을 하고 있는 올해부터는 재정위기가 본격화되었다. 이 상황은 이미 조금씩 드러나고 있지만 본격적인 내용은 2010년 2월 재정부가 결산을 정리하면서 드러날 것이다. 아마 지방선거에서도 이 문제가 이슈중의 하나가 되리라고 본다. 그나마 다행은 IT코리아의 결과 디지털예산회계시스템과 제도개선으로 결산이 이렇게 빨리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10년 전만 해도 결산이 10월에야 이루어졌다는 것을 생각하면 국가운영을 위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여하튼 우리는 위기를 좀 더 빨리 알 수 있게 되었다.

  

결론 - 숲을 보는 예산심의

‘사소한 것에 대한 관심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예산심의를 할 때 큰 사업을 보지 못하고 작은 사업들로 날을 지새는 상황을 비유한 것이다. 예를 들면 3-4조짜리 원자력 같은 것은 손도 못 대고, 제2건국위나 시민단체 지원금 같은 그야말로 푼돈을 가지고 옥신각신 하다가 회기 막바지에 겨우 통과시키는 것을 빗대기도 한 것이다. 이 법칙을 영국 경제학자 파킨슨이 주장한 것이니 서구국가들도 국회의 기능이 별로 나은 것이 없는 모양이다. 그래서 이런 대의제 민주주의의 문제점을 보완하고자 NGO등의 필요성을 보수 세력이 주장한 것이다. 하지만 그 NGO가 성격상 진보적인 성격을 띄울 수밖에 없는 것 eh한 역사의 역설인 셈이다.

아무튼 작은 나무도 보아야 하겠지만 숲을 보면서 국가를 파악하고 미래의 지도를 그려 내야한다. 국회의 최근의 예산수정률은 0.2%대에 불과하다. 예산심의라는 국회의 본원적 기능을 살리는 노력이 필요하다. 문제의식을 가지고 예산을 바라보자, 문제의식이 있어야 문제를 의식한다. 왜냐면 그 돈은 우리들의 돈이며 우리미래세대의 삶을 결정하는 돈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by 김대호 | 2009/10/17 10:56 | 보건의료복지 | 트랙백 | 덧글(3)

노무현 대통령 碑文 유감

노무현 대통령 碑文 유감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는 노대통령을 민주투사나 열사로 가뒀다.  

                                                                                         김 대호(사회디자인연구소장)

 

인터넷 댓글 쓰듯이 오래된 단상을 써 볼까 한다.

솔직히 나는 노무현 대통령의 비문;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가 맘에 안 든다. 목에 자꾸 걸린다. 이는 지난 6월 말 ‘아주 작은 비석’ 건립위원회가 비문을 확정한 이후 지금까지 줄곧 누그러지지 않는 느낌이다. 내가 그 위원회에 관계했다면 아마도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구절이 들어 있는 문장(말씀)이나, ‘원칙과 상식’이나 ‘거짓, 양심, 사랑, 자유, 행복’ 등이 들어있는 문장(말씀)을 강추했을 것이다. 이런 말들이 더 본원적이고, 보편적인 가치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음각된 비문은 풍부하고 생명력도 긴 노대통령의 삶과 정신을 민주투사라는 틀에 가두었다는 느낌을 준다. 미국의 ‘건국의 아버지들’이나 링컨 대통령이나 ‘마틴루터 킹’ 목사의 정신처럼 다수 국민들이 몇 대에 걸쳐서 공유하고 체화할 노무현 정신을, 민주화 운동 관련 훈장을 받은 사람들이, (민주주의 투쟁이 시대적 과제인) 당대에만 사용하는 불쏘시개로 사용 한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모든 개념은 현실이나 실체를 추상하여 만들어졌다. 추상을 통해 형성된 개념은 한자 뜻 그대로 특정 측면 혹은 주요한 측면은 뽑아내고 나머지는 버리도록 한다. 따라서 개념에 의해 마음이나 사고가 결정 지어진다. 사물, 특히 정치사회적 현상은 개념에 의해 재창조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정치사회 현상을 파악하는 개념들은 특정한 이데올로기나 특정한 정치사회 세력의 이해관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북한에는 ‘혁명과 건설’이라는 단어가 홍수처럼 흐른다고 알려져 있다. (일제와 미제로부터) ‘해방과 통일’이라는 말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그런데 ‘혁명과 건설’이나 ‘해방과 통일’을 시대정신으로, 즉 민족적, 국가적, 당적 최상위 과업으로 놓게되면, 평범한 인민들의 다양한 세속적 욕망들이 잘려나가고, 짓눌릴 수 밖에 없다. 인간의 가장 본원적인 욕망이자 가치인 자유와 행복이 짓눌려 버리기 십상이다. 가치 전도가 일어나기 십상이라는 얘기다.

 

한편 ‘혁명과 건설’이나 ‘해방과 통일’은 역사와 현실을 통찰한 선지자(?) 내지 엘리트들이 그 내용(의미)를 결정한다. ‘자유와 행복’이라면 그 의미를 개개인도 충분히 부여할 수 있기에 아무리 무식한 인민이라 할지라도 할 얘기가 넘치게 되어 있다. 그러나 ‘혁명과 건설’에 관해서는 이 내용(의미)를 깊이 이해한 수령, 당, 간부들로부터 지도 내지 교시를 받아야 한다. 더욱이 ‘혁명과 건설’을 최상위 과제로 올려놓으면 자동적으로 자유도, 행복도, 도덕도 다 정치 엘리트들에 의해 규정되고 강요된다. 인간의 무한히 다양하고 싱싱한 창의, 열정, 욕망이 그 놈의 ‘혁명과 건설’이라는 포르말린 통에 처넣어져 박제화 되고, 규격화 되어 버린다고 할 수 있다. 당연히 문화와 예술은 지극히 경직되고 활력을 잃고 앙상해져 버린다. 이는 북한에서 가장 극단적으로 나타난다. 한국 진보, 보수는 그 보다는 덜하지만 집단적 가치라는 포르말린 통에 생명, 자유, 행복, 안전 같은 본원적 가치를 집어 넣긴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나는 미국 헌법의 위대한 생명력의 근원이자, 미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힘의 근원은 1776년 7월4일 대륙회의 선언문(일명 미국 독립선언서)에 흐르는 핵심 가치(정신)와 우선순위라고 생각한다. 이는 지금 읽어도 감동적이다.

 

“(중략) 우리는 다음의 것을 자명한 진리라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하나님으로부터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 받았다. 그 권리 중에는 생명, 자유, 행복의 추구가 있다. 이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인류는 정부를 조직했으며 이 정부의 정당한 권력은 인민의 동의로부터 유래한다. 어떠한 형태의 정부이든 이러한 목적을 파괴할 때에는 언제든지 정부를 변혁 내지 폐지하여 인민의 안전과 행복을 가장 효과적으로 가져올 수 있도록……새로운 정부를 조직하는 것이 인민의 권리이다” (1776년 7월 4일 대륙회의, 아메리카 13개 연합 주의 만장일치 선언)

 

생명, 자유, 행복, 안전은 인간의 가장 본원적인 가치이다. 아무리 못 배운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내용(의미)을 규정할 수 있고, 권력자에 대해서는 부여받은 사명을 이행하도록 강제하는 무기로 쓸 수 있다. 게다가 미국 독립선언서는 정부의 조직 이유를 이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서라고 못 박았다. 한술 더 떠서 이를 보장 못하거나 파괴하는 정부는 폐지하여야 한다고, 이른바 혁명권까지 명시하였다.

 

그런데 우리는 평범한 인민이 권력자나 지도자에게 들이댈 수 있는 무기를 별로 강조하지 않는다. 반면에 시대를 통찰하는 엘리트들이나 휘두를 수 있는 무기(집단적 가치)를 강조해왔다. ‘반공’ ‘조국근대화’ ‘산업화’ ‘민주화(민주주의)’, ‘시민주권’, ‘국민참여’ '신자유의 반대' ‘사회통합’, ‘사회정의(이건 내가 특별히 강조한다)’ 등이 그런 것들이다. ‘혁명과 건설’, ‘해방과 통일’, ‘민족 자주’를 주구장창 부르짖는 북한은 특히 심하다.

 

북한은 말할 것도 없고, 한국 진보, 보수가 공히 집단적인 가치나 방어적인 가치를 부르짖는 것은 집단적인 생존 위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한 집단적인 가치(자주독립, 근대화, 민주주의 등)를 실현해야 국민의 생명, 자유, 행복 등 최상위 가치를 보장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 일 것이다. 이는 독립 당시 미국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런데 미국은 反英 독립투쟁 와중에도, 독립선언서에 보듯이 생명, 자유, 행복, 안전 등의 본원적인 가치를 앞세웠다. 이것을 추구하기 위한 투쟁이라는 것을 문서로서 명시하였다. 이것이 미국과 한민족(진보, 보수, 조선노동당 등)의 차이가 아닐까 한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민주주의, 민족 화해.협력, 원칙과 상식, 양심 등을 앞세워 집권했다. 집권 이후에는 인간의 생명, 자유, 행복, 안전의 조건을 확보하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했다. 이는 민주주의를 넘어서는 고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노대통령의 서거로 진보 개혁 민주파는 너무나 익숙한 자리로 되돌아 왔다. 독재가 탱크를 앞세워 물밀듯이 밀려올 때 용감하게 저항하던 좁은 보루, 참호, 토치카로 말이다. 이 참호의 현판에 씌어있는 글이 바로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다. ‘시민주권’이나 ‘국민참여’ 역시 좁은 참호에서는 매우 인기 있는 현판이다.

 

나는 참여정부, 열린우리당, 민노당, 진보 언론, 진보 시민단체 등 진보의 총체적인 몰락 내지 좌절은 뭐니 뭐니 해도 (집권 전에) 집권 이후 대한민국을 어떻게 경영할지 치열하게 고민하지 않아서라고 생각한다. 이를 깨닫고 노대통령은 퇴임 후 새로운 ‘진보주의 연구’를 하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노대통령과의 정치적 인연을 훈장처럼 받은 사람들을 포함한 진보파 전체가 노대통령이 생의 마지막까지 부여잡은 거대한 화두를 대체로 놓아 버린 것처럼 보인다. 너무나 익숙한 ‘민주주의 투쟁’ ‘반MB투쟁’을 화두로 잡은 것처럼 보인다. 당연히 정치적 상상력과 관심 영역이 국가 경영에서 반MB, 민주수호투쟁으로 쪼그라 들었다. 이것은 정신적 퇴행이다. MB가 문명 역주행을 한다고 해서 우리의 정치적 상상력, 안목, 관심 영역마저 역주행 할 필요는 없는데 말이다.

 

그런 점에서 노대통령의 비문에 민주주의를 넘어선, 인간의 본원적 가치가 새겨지지 않은 것이 아쉽다.  유서가 준 길고 깊고 강렬한 울림을 이어가지도 증폭시키지도 못하고, 민주투사 노무현만 부각시킨듯 하여 아쉽다. 가치=개념=문장은 인간의 정치적 상상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생각하는 방식과 추구하는 가치(우선 순위)와 영혼의 폭과 깊이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 근대화의 이념적, 정신적 완성은 헌법 조문에 3.1운동, 임정 법통, 4.19 등 방어적이고 집단적이고 (정치적 이해관계로 인해)논란도 많은 가치들이 빠지고 미국 독립선언서처럼 인간의 본원적 가치가 전면에 오는 날이 아닐까 한다. –끝-  

by 김대호 | 2009/10/14 20:37 | 철학과 가치 | 트랙백 | 덧글(31)

추석 귀향 단상: 20년 된 친목회의 퇴락을 보고

-경제사회적 활력과 나의 무심함을 생각하다- 

                                                                                       김대호(사회디자인연구소장)

 

나는 설, 추석이면 명절 전날 저녁 고향 사천(삼천포)의 동년배 친목회에 참석한다. 20년 전 첫 모임을 ‘삼용 다방’에서 가졌기 때문에 이름이 ‘삼용회’다. 이름이 거시기 하다고 해서 예쁜 이름으로 개칭도 해봤으나 결국 삼용회로 복귀해 버렸다. 그런데 이제는 모임 자체가 거의 생명이 다했다.

 

나는 1994년 설을 제외하고는 그 모임에 한번도 빠지지 않았다. 1994년 설에는 내려가는데 28시간이 걸려서 설 당일 새벽에 고향에 당도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지금은 누가 친목회원인지 불분명하다. 회비도 없다. 경조사도 챙기지 않는다. 따라서 말이 친목회지 이제는 명절 전날 만나서 술 한잔 먹는 모임에 불과하다. 근 15년 이상 10~15명이 꾸준히 모였는데, 언제부턴가 5~8명 내외로 줄었다. 이번에는 나 포함 4명이 모였다. 향후 몇 년 내에 우리 부모님들이 추석을 쇠러 역 귀성을 하게 되면 이 모임은 확실히 끝날 것이다.

 

이 글을 쓰는 것은, 이 모임의 궤적과 구성원(친구)들의 개인史에서 민주화운동 혹은 386세대의 한계, 오류도 뚜렷하게 느껴지고, 20년 내에 우리 세대와 자식 세대가 겪을 위기도 뚜렷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모임을 만든 것은 초.중.고를 같이 다니면서 그냥 친해진 동갑내기 불알 친구라서가 아니다. 우리는 학생운동이 거세게 일어나던 1980년대 초.중반, 대체로 그 가치와 정신에 공감한 친구들이다. 친구들 면면은 이렇다. 

 

A는 S大 사회대를 나왔는데 1980년대 흔한 조직 사건으로 구속되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을 살았고, 민노당원이며 지금까지 민노총에서 중책을 맡고 있다. 나처럼 1990년을 전후한 시기에 공장(현장)을 다녔다.

B는 초등학교 때 한 반 이었는데, S大 공대를 나왔고 코오롱 다니다가 회사가 유학을 보내줘서 미국에 들어갔다가, 외환위기로 복귀 명령을 받자 귀국을 거부하고 그대로 미국에 눌러 앉았다.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7~8년 보내다가-그래서 아버지가 돌아가셔도 한국에 들어오지 않았다- 용케 미국 영주권을 받았다. 지금은 미국 동부에서 건축 관련 일을 하고, 아주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애는 없다. 모임에 안 나온 지는 10년이 넘었다.

C는 S大 치대를 나와서 마산에서 개업을 오랫동안 했고, 몇 년 전부터는 대전에서 의료생협에 소속되어 일하고 있다. 대체로 민노당, 진보신당 정서를 가지고 있다. 모임에 안 나온 지 몇 년 된다.

D는 Y大 이공대학을 나와서, S전자에 20년 가까이 다니고 있다. 올해는 회사가 바빠서 내려오지 못했는데, 이번 한번을 제외하고는 모임에 완전 개근을 했다. 물어 보지는 않았지만 의사 하는 친구와 더불어 대선 때 김영삼, 이회창, 이명박을 찍었을 가능성이 있다. 

E는 S大 공대를 나와서, 1990년대 초반에 공기업에 입사하여 지금까지 잘 다니고 있다. 아니 잘 나가고 있다. 정치의 중요성을 잘 알고, 정치가 제 역할을 해 주기를 학수고대하고, 필요하면 지원도 할 용의도 있다. 민주당, 민노당, 진보신당, 창조당 등은 미래가 없다고 생각한다. 노무현 세력에게 꽤 기대를 했으나 막상 나타난 신당은 꽤 실망을 준 모양이다.

F는 지방 K大를 나와서 직장 생활을 한적이 거의 없다. 丹이나 氣에 오랫동안 심취하여 무슨 도사(사범)가 되나 했는데 요즈음은 작은 유통업을 하고 있다. 모임에 완전 개근했고, 요즈음 이 친구가 소집 책을 한다.

G는 지방 H大를 늦게 입학해서 늦게 졸업하고, 장가도 한번인가 두 번 갔다 왔고, 요즈음은 25톤 트럭을 몬다. 지금은 재혼인가 삼혼인가 해서 부인의 전 남편 애(딸)도 잘 키우고, 일곱 살 난 친 아들 보는 재미로 산다고 한다. 요즈음 들어 가족 행복을 맞보는 느낌이다. 1986~7년에 나에게 주민등록증을 빌려줘서, 내가 이 친구 이름으로 공장을 다니는 등 근 1년을 살았다. 87년 대선 땐가 92년 대선 땐가 모르겠는데, 이 친구가 속한 洞에서 김대중 표가 딱 2표가 나왔는데, 그것은 이 친구와 (이 친구가 설득한) 친할머니 표라는 것이 전설처럼 떠돌고 있다. 

H는 지방 B大를 나와서 제약회사 영업사원을 몇 년 하다가 접고, 이런 저런 일을 전전하다 택시 운전도 하고, 몇 년 간 반 백수처럼 지내다가 최근에는 25톤 트럭을 몰겠다고 F의 조수 노릇을 하고 있다고 한다.

I는 고교 시절 잠깐 내 하숙집 룸메이트였는데, 3수 끝에 들어간 SS大를 중퇴하고-이것은 1980년대 중반 나와 A가 징역 가고, 공장가면서 대학 졸업장을 우습게 여긴 것이 약간의 영향을 미쳤다- 제조 회사 잘 다니다가, 큰 돈 벌어보겠다고 고위험 고수익 대출을 주로 하던 ’파이낸스’ 회사에 다니다가, 외환위기 직후 이 회사가 파산하면서 자신이 책임지고 끌어온 친구 돈, 친가 돈, 처가 돈 합쳐서 10억 가까이 날렸다. 거액의 채무 때문에 법적으로 이혼도 하고(그래서 부인과 애들을 모녀 가정으로 만들어 기초생활보호대상자가 되게 하였다), 외환위기의 후유증을 지금껏 앓고 있다. 최근에는 용접기술을 배워서 철골 용접을 하고 있다. 지난 대선 때는 문국현에게 열광했다가 깊이 실망했다.

J는 3수 끝에 지방 S大 의대(가정의)를 나와서 개업해서 몇 년간 잘 벌었는데, 수익이 떨어지자 물 좋을 것 같은 곳으로 옮겨서 또 개업했는데 실패하고, 또 옮겨서 실패하고, 또 옮겨서 실패하였다. 지금은 의사 두 명이서 하는 노인(요양)병원에 다니고 있다. 비타민 전문가가 되었는데, 이젠 돈 크게 벌 욕심을 버렸다고 한다. 그런데 상당수 의사들처럼 김대중, 노무현을 아주 싫어한다.

 

그 외에도 스쳐간 친구들도 좀 있는데, 나와 원래 친하지 않았고, 중간에 잠깐 모임에 나왔다가, 안 나온 지 오래되다 보니 개인사를 잘 모른다. (모임을 하다 보니 명절에 외롭게 지내던 친구들 -중.고 시절 성향도 그렇고, 대학 때도 학생운동의 가치, 정신과 거의 담쌓고 지내던 친구들- 몇몇이 끼워달라고 해서 끼워주었는데, 이는 일부 열심히 참석하던 초기 멤버들을 모임에서 멀어지게 한 효과도 있었다)

 

우리 친목회 친구들은 미국 같았으면 아마 거의 민주당을 지지했을 것이고, 영국 같았으면 거의 노동당을 지지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국은 1987년에 양김이 분열하고, 1990년대 후반부터는 민주노동당 계열(국민승리21, 민노당, 진보신당 등)이 출현하고, 2007년에는 창조한국당이 출현하면서, 선호하는 정치인과 정당이 다르다 보니 정치 얘기를 기피하게 되었다. 우리 모임을 묶고 있던, 어떤 공감대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당연히 열심히 운동하던 친구들의 알량한 권위(?)도 사라졌다.

 

요즘 들어서 부쩍 뚜렷해지는 생각인데, 한 명과의 좋은 인연은 1천 명과의 좋은 인연이고, 1명과는 악연은 1천명과의 악연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삼사십년 친구들에게 1년에 두 번 술 한잔 하는 것 이상의 정성을 쏟지 않았다. 내 비록 돈은 없지만, 정보와 인맥이 있기에 이 친구들에게 뭔지 모르지만 도움을 줄 여지가 있었을 텐데……내 무심함이 아프다.

 

1930년생 아버지, 1960년대 생 우리

위에서 열거한 친목회 친구들의 아버지들은 대체로 1930년대 생이다. 1936년 생이 제일 많은 것 같다. 내 아버지를 포함해서 몇몇 친구들의 아버지들도 친목회(갑장계)를 한다. 그런데 지금 보니 아버지들 보다 아들(63년 토끼띠)들이 가방 끈이 좋은 것은 확실하지만, 경제.사회적 지위는 오히려 낮은 사람이 더 많은 것처럼 느껴진다. 늙어서 연금이라도 제대로 받을 수 있는 친구는 S전자와 공기업 다니는 녀석, 치과의사, 가정의 하는 녀석 정도 가 아닐까 한다. 미국 간 녀석은 어떨지 모르겠다. 그런 점에서 너무 큰 사각지대를 가진 연금 시스템을 개혁 하는 일의 정치적 중요성이 느껴진다.

 

더 큰 문제로 느껴지는 것은 우리 자식 세대(1990년대 생)다. 과연 우리 자식 세대들이 자라서 S전자, 공기업, 치과의사, 의사 라는 좁은 문을 뚫어낼 수 있을까? 내 큰 애가 고3이다 보니 이 정도를 뚫기 위해 지금 성적이 어느 정도 나와야 하는지를 알기에 고개가 설레설레 흔들어 진다.(물론 좁은 문을 통과하는 것이 성적 순은 아니지만….)

 

한편 과거 우리 아버지 세대는 뭘 하든; 가게를 하든, 작은 선박으로 수산업을 하든, 수산물 유통업이나 가공업을 하든, 어쨌든 작은 사업을 성공적으로 키워 나갔다. 우리 아버지 세대의 공무원과 교사는 지독한 박봉이었으나 지금은 엄청나게 나아졌다. 특히 은퇴 후 연금이 좋다. 이래 저래 아버지 세대는 대체로 성공을 했고, 우리 같은 자식들이 대부분 대학을 나오게 하였다. 

 

그런데 우리 세대(1960년대 생)는 아버지 세대가 연출한 신화를 재연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 자식 세대도 재연할 것 같지가 않다. 솔직히 더 어려워질 것 같다. 바다(수산업)가 피폐해지고, 유통 방식이 현대화되고, 유통업과 제조업 등을 가리지 않고 거의 모든 분야에서 재벌대기업의 위세가 커지면서 도전이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미래를 비관하는 것은 전반적으로 몰락해 가는 지방 소도시라는 창을 통해서 미래를 보기 때문일 것이다. 단적으로 택시를 탔더니 택시 운전사가 ‘20년 전에는 시내에 극장이 2개, 나이트 클럽(스탠드 바를 말하는 듯)이 5개 있었는데 지금은 하나도 없다’고 푸념했다. 또 하나 내 눈에 덮어씌워진 비관의 색안경은 아무래도 내 주변 사람들이 한창 성장하는 부문; 즉 해외 시장 관련 부문, 첨단 기술 부문, 그 외 보건의료, 관광레저, 교육 등 사회서비스 부문과 거리가 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 세대의 노후와 자식 세대의 미래를 위태롭게 생각하는 것은 나의 협소한 경험 탓만은 아닐 것이다.

 

이중구조 사회

고교 동창들, 고향 친구들이 살아가는 것을 보면 한국은 강고한 이중구조 사회라는 것이 확연하다. 공공부문에 근무하는 친구들의 생활이 확실히 낫다. 소득도 높고 무엇보다도 안정되어 있다. 그리고 S전자처럼 세계적인 기업에 근무하거나 관련 협력업체에서 일하는 친구들은 혹사 당한다 싶을 정도로 바쁘다. 그렇게 해도 S전자 사무관리직은 50세가 되도록 임원으로 올라가지 못하면 눈치 밥을 먹어야 한다. 과거에는 모기업을 퇴직하면 협력업체 임원 등으로 가는 길이 많았으나 지금은 속절없이 실업자가 될 공산이 커다. 당연히 회사의 음성적 퇴직 압력에 저항하는 만년 대리, 과장, 차장들의 투쟁 의지도 강해졌다. 10여 년 전만해도 회사가 눈치만 줘도 우수수 사표를 쓰던 사람들이 노조를 결성하여 대항하려고 한다. 그래서 피라미드식 조직 구조를 갖고 싶어하는 대기업의 의도가 쉽게 관철되지 않는다.

 

이래저래 이중구조 사회는 아래의 도전과 안팎의 순환을 어렵게 한다. 사회 전반적으로 도전을 어렵게 하고, 사회를 경직되게 하고, 기득권자들을 방어적으로, 소심하고 비겁하게 만든다. 또한 수출대기업의 성과(잉여)를 유관 가치생산 사슬을 통해서 널리 확산시키지 않는다. 비대한 수도권과 지방의 관계도 비슷하다. 

 

문제는 역동성

민주, 진보, 개혁으로 자신의 정치적 정체성을 표현하는 사람들이 박정희, 전두환 시대를 떠 올릴 때 음지로 지목하는 것 중의 첫째는 정치적, 문화적 폭압과 부동산 불로소득이다. 이는 엄청난 경제적 비효율과 사회문화적 퇴행을 초래하였다. 이는 민주화 운동을 통해서 많이 해소되었다. 한편 양지로 지목하는 것 중의 첫째는 높은 (외형적) 경제성장 일 것이다.  그런데 지금 돌아보니 우리 아버지 세대들이 경험한 경제.사회적 유동성 내지 역동성이 첫째로 꼽아야 할 양지가 아닌가 한다. 정말 박정희, 전두환 시대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영업과 중소기업을 통해서, 높은 기술.기능이나 고학력을 통해서 더 나은 삶으로의 도전에 나섰고 대체로 성공을 맛보았다. 공공부문과 재벌대기업 노동의 특권적 지위도 확고하지 않았다. 격차가 그리 심하지 않다보니 안과 밖의 순환이 원활했다. 그러나 지금은 위로 올라가는 대부분의 사다리가 너무 적어지고 좁아졌다. 

 

유연안정시스템이 먹힐까?

진보는 이중구조 사회 혹은 역동성이 떨어지는 사회에 대한 처방으로 덴마크식 유연안정성을 제시했다. 하지만 조직노동은 튼실한 사회안전망 보다 ‘고용임금 유연성’이 먼저 들어올까 봐 이 처방을 매우 의심스럽게 쳐다 본다. 솔직히 옳은 판단이다. 그 어떤 경우에도 한국의 조직노동은 자신의 기득권을 상당부분 내 놓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덴마크가 유연안정 시스템을 채택할 수 있었던 것은 높은 세금, 거대한 복지 재정, 높은 사회적 신뢰 수준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사회전반적인 임금(소득)의 평등도가 높기 때문이다. 공공부문-민간부문, 원청대기업-하청중소기업,  지식노동-육체노동, 남성-여성 등의 격차가 크지 않고 각각의 평균 소득이 대체로 1인당 GDP(한국으로 치면 연봉 2천만 원)에서 오락가락 하기 때문이다. 물론 노동시간도 한국에 비해 엄청나게 짧다. 따라서 유연안정시스템을 한국에 적용하려면 기존 기득권자들의 엄청난 양보를 필요로 한다. 이는 사업장 내에서 정규직-비정규직, 전임교수-시간강사의 격차를 합리화 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마찬가지로 토건 재정을 복지 재정으로 돌리는 것도 어렵고, 세금을 왕창 더 걷는 것도 엄청나게 어렵다. 그래서 유연안정시스템을 부르짖는 사람들의 목소리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고, 듣는 사람도 귀담아 듣지 않는다. 당연하다.

 

3비층은 누구 편일까?

유연안정시스템 얘기가 허망하게 들리는 것은 이 때문만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그래 봤자 이는 ‘노동’관련 처방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한국은 3비층-비경제활동인구(반실업자), 비임금근로자, 비정규직 층-이 거대하다.  유럽 선진국에 비해 소기업 비중도 높다. 사실 비경제활동인구 및 비임금근로자와 심지어 비정규직 조차도 정치, 경제적 이해관계는 소기업가들과 근접하지, 조직노동과 근접하지 않는다. 조직노동의 고용임금이 올라가는 것보다는 소기업가들이 잘되는 것이 자신들에게 훨씬 이익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고용을 창출하기 때문이다. (민노당, 진보신당이 아무리 자신들이 비정규직 등 사회적 약자 편이라 하더라도 그들이 자신의 편을 들지 않는 것은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3비층과 소기업가들에게는 (세금, 재정 여건상 결코 튼실 할 수가 없는) 복지 솔루션 보다 공정 경쟁 솔루션이 더 잘 먹힌다. 특히 재벌대기업의 불공정거래를 근절하는 것이 훨씬 절실하다. 공공부문의 대기업 위주의 편의주의적 발주 관행을 근절하는 것이 훨씬 절실하다. 더 나아가 공공부문과 재벌대기업과 일부 전문직종이 싹쓸이 하다시피 한 청년인재들이 벤처중소기업으로 흘러 오도록 하는 시스템도 절실하다. 창업(걸음마) 단계에 있는 벤처기업을 잘 지원하는 벤처금융시스템도 절실하다. 이런 솔루션들은 유연안정시스템 개념에 포함되지 않고, 대체로 기업가, 자본가를 이롭게 하기에 오로지 조직노동의 이해와 요구를 중심으로 세상을 보는 진보는 관심이 없다. 당연히 민노당 하는 친구가 우리 친목회에서 목에 힘 줄 만한 얘기가 있을 리가 없다.

 

나는 한국에서 집권 가능한 진보는 진짜 유연안정성과 더불어 경제사회적 활력과 역동성을 잘 구현할 것 같은 정치세력이 아닐까 한다. 한마디로 벤처중소기업가들을 우리 편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다. 이들을 우리 편으로 만들면 3비층과 청년층의 다수를 우리 편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끝-

by 김대호 | 2009/10/08 00:46 | 정치와 통계 | 트랙백 | 덧글(9)

오세훈의 ‘3% 퇴출제' 소동

오세훈의 ‘3% 퇴출제' 소동

                    김대호(사회디자인연구소 소장)

 

세훈과 김문수가 2009년 9월 15자로 책을 한 권씩 냈다.

오세훈은 <시프트(Shift)-생각의 프레임을 전환하라->(267페이지)를 ‘리더스 북’출판사에서 냈다.

김문수는 <나는 일류국가에 목마르다-김문수, 조갑제 할 말은 한다->(534페이지)를 ‘북마크’출판사에서 냈다. 이는 김문수와 조갑제의 대담 형식을 빌었고, 대부분의 대담은 2008년 여름과 가을에 이루어진 것처럼 보인다. 이를 장원재가 편집.정리했다. 물론 김문수, 조갑제의 공저이다. 류근일이 추천사를 썼다. 두 책 모두 내년 지방선거를 대비한 포석이라는 것은 단박에 알 수 있다. 

 

나는 이 두 권을 지난 토요일과 일요일에 다 읽었다. 내가 책을 빨리 읽는 편은 아니지만 두 책 다 참 읽기 편하게 씌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글은 서평이 아니다. 하지만 이 글의 소재가 두 책이기에 아주 간략히 소감(인상)만 언급하고 ‘3% 퇴출제’ 소동에 대해서 얘기하려고 한다.

 

오세훈 책을 덮고 나니 오세훈의 생각의 폭과 깊이가 참 얕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역시 (샐러리맨 생활 등) 밑 바닥을 기어보지 않았고, 뒤틀린 역사를 부여잡고 피눈물을 흘려보지 않은, 팔자 좋은 사람의 정서와 사고방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도시경쟁력, 문화, 디자인, 환경(대기 질, 자전거, 생태 등), 여성, 부드러움, 창의시정, 개인경쟁력(JOB nomad) 등 미래 트렌드를 강조하기에 (한국의 모순.부조리를 잘 모르거나 눈을 감고 있는) 중산층, 여성, 청년층에게 꽤 어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점에서 오세훈 입장에서는 이 책은 안 낸 것보다는 낸 것이 나아 보였다. 반면에 김문수 책은 안 낸 것이 차라리 나아 보였다. 물론 김문수는 여러 사안에서 조갑제와 차별성도 많이 드러냈다. 하지만 조갑제의 황당한 생각에 공감을 표한 것도 적지 않았다. 이 대목은 앞으로 김문수의 정치적 부담으로 남을 것이다. 조갑제와 대담 자체로 얻는 정치적 이익(한국 극우 세력 안심시키기)도 있겠지만, 손실이 훨씬 클 것이라고 생각한다. 김문수는 오세훈과 달리 미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조갑제, 류근일과 대화를 통해서 과거를 해명하려는 것 같았다. 낡은 시대정신을 붙잡은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이 책을 읽고서 비로소 김문수가 왜 극에서 극으로 가는지 이해가 되었다. 1980년대 중반의 정치적 좌편향(서울노동운동연합 활동) 1980년 봄의 극단적인 정치적 무관심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또 지금의 적지 않은 극우적 행태는 서노련과 민중당의 정치적 좌편향의 반동이라는 것도 알았다.

 

김문수는 2002년 대선 과정에서 노무현의 신혼 시절의 부끄러운 일화가 담긴 ‘여보 나 좀 도와줘’(새터 출판사)의 몇 구절을 인용하여 노무현을 성격 파탄자로 모는 연설을 했다. 이제 김문수는 조갑제와 공저로 낸 이 책의 몇 구절을 인용한 매서운 공격에 시달리지 않을까 한다. 노무현의 고백은 용기있게 드러낸 정치인의 젊은 시절의 치부이기에 정치 도의(?)상 눈감아 줘야 하는데 김문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서 한 김문수의 얘기는 철저히 검증하고 비판해 줘야 할 정치적 견해이기에 정치 도의(?)상으로도 가혹하게 비판, 검증해 줘야 할 것 같다. 기회가 있으면 한번 해 볼까 한다. 그런데 나 아니라도 할 사람이 많을 것 같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 한다.

오세훈이 서울시장으로서 펼친 정책 중에서 매우 신선하고, 쇼킹하고, 전국적 반향(모방)도 컸고, 따라서 점수도 많이 딴 정책 중의 하나가 서울시 ‘공무원 3% 퇴출제’일 것이다. 이는 2007 3월에 처음 실시되고 2008년에도 이어졌다. 오세훈의 책에서도 주요하게 거론되는 것을 보니 지금도 모양을 바꾸어 진행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도대체 이 정책은 어떤 발상에서 나와서, 어떻게 진행되고 있을까? 오세훈은 책에서 어떻게 얘기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서울시에 들어와서 직접 보니 참 대단한 조직이었다.(중략) 워낙 스케일이 큰 조직이다 보니, 그 안에서 트레이닝 된 직원들의 업무 역량은 일반 시민들이 공무원에 대해 가지고 있는 편견과는 아주 달랐다. 내공이 단단한 직원들이 상당히 많다. 다만 조직문화가 문제였다. 때가 되면 알아서 승진되고 정년까지 보장되다 보니 굳이 일을 벌여 문제를 만들 필요가 없다는 의식이 퍼져있었다. 실수 없이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승진이 되는데 공연히 의욕이 앞서서 일을 벌이다 실수라도 생기면 오히려 감사를 받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조직에 창의성이 발현되기 힘든 구조였다. 이를 바꿔 보겠다고 시작한 것이 인사혁신이었고, 그 첫 결실이 ‘3% 퇴출’이었다. 계획이 발표되고 최종 전출 대상자가 선정되기까지 한 달은 직원들에게 심히 공포스러운 시간이었던 것 같다.(중략) 당장 구내 이발소와 매점, 직원 휴게실과 흡연실이 텅 비었다는 기사들이 이어졌다. (중략) 그러던 중 어이없는 일이 발생했다. 분명히 실.국장 및 사업소장의 책임하에 태만하거나 조직 내 화합에 현저하게 해를 끼치는 직원을 전출 대상자로 선정해 제출하도록 했는데도, 퇴출 후보자를 선정하기 위해 인기투표 식 직원 투표를 실시한 사업소까지 나왔다. 솔직히 말하면 한심해서 말이 안 나왔다.(중략) 최고 간부들조차 인사혁신의 취지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기도 했다. 곧바로 책임자를 직위 해제했다. (중략)우여곡절 끝에 첫해에 추려진 대상자는 102, 처음에는 250여 명 정도가 선별되었으나, 이런저런 소명 기회를 갖고 다시 추려보니 3%가 아닌 1% 내외에서 정해졌다. 다음 해인 2008년에도 퇴출 공무원을 선발하자 직원들의 민심이 그야말로 흉흉해졌다. 간부들 사이에서도 퇴출제도는 그만 끝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중략) 하지만 무엇이든 처음이 가장 고통스러운 법이다. (중략) 내가 가장 신경을 쓴 것은 퇴출 후보군 선정이 최대한 공정하고 타당하게 이루어지도록 하는 일이었다. 그 결과 실제 일 잘하면서 퇴출 후보로 뽑히는 경우는 한 건도 없었다. 업무시간에 술 먹고 추태를 부리는 일이 허다한 직원, 9개월 중 2개월을 병가와 연가를 번갈아 내며 개인 휴가로 사용하더니 출근해서는 개인 용무를 보기 위해 무단으로 자리를 비우는 것이 습관인 직원, 휴게실에서 TV를 보다가 낮잠 자는 것이 일상인 직원, 민원인의 전화를 받기 싫다며 아예 전화 벨 소리를 들리지 않도록 해놓고 업무는 뒷전인 채 승진시험에 몰두한 직원 등 동료들이 봐도 심하다 싶은 직원들이었다. (중략) 퇴출제 자체에 대해서는 여전히 긴장했지만, ‘그럴 만한 사람들만 퇴출됐다.’는 인식이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선정된 이들을 곧바로 퇴출시키는 것이 아니라 재교육시키는 시스템으로 정착되면서 직원들의 공감대가 더욱 넓어졌다.(오세훈 책, p 190~193)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얘기할까? 공무원 노조 등의 얘기는 접어두고, 이명박 정부의 국가인권위원회(위원장 안경환)의 얘기를 한번 들어보자. 이는 2008 10월 초 프레시안이 보도했다.

 

“ 국가인권위원회(위원장 안경환)가 서울시의 '현장시정추진단', 일명 '3% 퇴출제'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부적격 공무원에 대한 재교육과 퇴출 시스템"으로 도입한 이 제도가 지방공무원법 등 법령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절차적 문제가 있으며 교육 프로그램도 풀 뽑기 등의 '징벌식'이라는 것이다.

 

 인권위는 (2008 10) 2 "현장시정추진단 대상자 선정 및 시행 과정에서 인권침해가 발생했다"며 서울시장에게 향후 비슷한 계획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똑같은 인권 침해가 재발되지 않도록 대책 마련을 권고했다.  또 인권위는 서울시 외 다수의 지방자치단체에서 유사한 제도를 운영하거나 검토 중인 점을 고려해 행정안전부 장관에게 "비슷한 인권침해 사례가 발생하지 않도록 철저한 지도•감독에 나서라"고 주문했다.(중략)

 

 인권위가 현장시정추진단의 문제로 지적한 첫 번째는 선정 절차 및 기준이다. 인권위는 "서울시가 인사혁신을 통해 공직사회 경쟁력 향상과 양질의 대국민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취지는 이해하지만 객관적 기준과 적법한 절차에 따라 대상자를 선정해야 한다"고 못 박았다.

 

 당초 서울시가 밝힌 현장시정추진단의 구성 기준과 막상 선정된 사람들의 면면이 확연하게 달랐다는 것이 인권위의 결론. 서울시는 '무사안일 직무 태만자, 조직 내 화합을 해치는 자, 품위 및 이미지를 훼손한 자, 봉사 마인드가 부족한 자'를 선정해 재교육을 시키겠다고 했지만, 인권위 조사 결과 "제도의 취지와 달리 장애인•질환자•정년퇴직 예정자•소수직렬 등이 상당이 포함됐다"는 것이다. 또 절차적 문제점도 지적됐다. 5급 이상의 지방공무원을 전보할 때 인사위원회의 의결을 거쳐야 하는 등의 절차를 규정한 지방공무원법과 지방공무원임용령을 서울시가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인권위는 이어 "서울시는 해당자 명단을 공개하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공무원 사회 내외부에 알려지게 돼 대상 공무원의 인격과 명예에 대한 권리를 침해했다"고 밝혔다. 헌법 제7(기사에서는 10조로 되어 있는데 이는 기자의 실수이다) 위반이라는 것이다.

**참고로 헌법 제7조는 다음과 같다.

 1)공무원은 국민전체에 대한 봉사자이며, 국민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

2)공무원의 신분과 정치적 중립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된다”

 

구성 이후 진행된 교육 훈련 프로그램의 문제점도 지적됐다. 인권위는 "조사 결과 현장시정추진단에 대한 교육 훈련은 장기간의 풀 뽑기 및 쓰레기 처리 등 대부분 현장 노동 중심이었다" "이는 사실상 징벌성 수단으로 대상 공무원으로 하여금 인격적 모멸감을 갖게 했다"고 밝혔다. 인권위는 "이는 헌법 제15조가 보장하는 직업 선택의 자유 및 제10조의 인격권 침해 행위"라고 덧붙였다.(중략) 인권위는 또 "상당수 질환자나 고령자에게도 건강상태에 대한 고려 없이 획일적으로 교육 프로그램이 적용됐다" "이것이 공무원의 교육훈련에 관한 법적 요건을 구비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결론 내렸다.(프레시안 여정민/기자)

 

김문수도 3% 퇴출제와 관련된 언급을 했다. 김문수는 (‘행정 조직 개편’ 전망을 묻는 조갑제의 질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굉장히 어렵습니다…제일 어려운 게 뭐냐 하면, 공무원의 신분을 보장하는 한편으로 경쟁 내지 평가에 의한 퇴출제도를 만드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은 공무원의 신분은 절대적으로 보장돼 있는 반면 퇴출을 못 시킵니다. 말만 퇴출이고 퇴출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김문수.조갑제 책, p 440)

 

사실 오세훈이 퇴출시켰다는 불량 공무원, 즉 “업무시간에 술 먹고 추태를 부리는 일이 허다한 직원, 9개월 중 2개월을 병가와 연가를 번갈아 내며 개인 휴가로 사용하더니 출근해서는 개인 용무를 보기 위해 무단으로 자리를 비우는 것이 습관인 직원, 업무는 뒷전인 채 승진시험에 몰두한 직원 등”은 ‘3% 퇴출제’에 의해서 퇴출된 것이 아니다. 현행의 헌법, 법률, 관행에 의해서도 징계와 퇴출이 가능하다.

 

게다가 “퇴출 후보자를 선정하기 위해 인기 투표식 직원 투표를 실시”하는 것은 ‘3%’라는 기준을 제시한 이상 필연이다. “태만하거나 조직 내 화합에 현저하게 해를 끼치는 직원”을 적어내라고 했지만, 해당되는 사람이 없는 사업소가 적지 않다. 이런 사업소에 대해서도 ‘3%’라는 기준은 어김없이 적용된다. 그러면 ‘직원 인기 투표’는 사업소장 입장에서 오히려 현명한 것이다. ‘우리 사업소에는 해당자가 한 명도 없다’고 용기 있게 말하고 그것이 받아들여지면 너나 할 것 없이 그렇게 말할 것이기에 ‘3%’ 가이드 라인은 무력화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용기 있는 사업소장은 미운 털이 박히게 되어 있기에, 희생자 선정을 위한 투표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원래 인간 조직은 권력자가 ‘3%’든 ‘1%’든 가이드 라인을 제시하면 무리해서라도 거기에 맞춰야 한다. 후유증은 필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이드 라인을 운영하는 이유는 후유증에도 불구하고 종합적인 이득(merit)이 크기 때문이다. 가이드 라인에 따른 후유증, 변칙 등을 예상하지 못하면 그야말로 세상 물정을 모르는 것이다. 그런데 오세훈은 간부들이 자신의 ‘인사혁신의 취지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며 한심하다고 말하면서 ‘곧바로 책임자를 직위 해제했다’고 한다. 둥근 네모를 만들어라 는 엉터리 지시를 해 놓고, 이를 나름대로 지혜를 짜내어 이행한 사람을 징계한 격이다. 그런 점에서 이 때 직위 해제된 사람이 인기 투표 건으로 직위 해제되었다면 심히 부당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으리라 확신한다)

 

그런 상상을 해 본다. 오세훈이 아니라 진보개혁 계열 서울시장이 3% 퇴출제와 ‘현장시정추진단’을 운영했고 국가인권위원회가 법 위반 판단을 내렸다면, 그래서 누군가 서울시장을 헌법과 법률 위반으로 고발을 해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면, 아마 탄핵을 하지 않았을까? 노무현 대통령 탄핵사태가 그렇게 일어난 것이 아닌가?

 

나는 제대로 된 '3% 퇴출제'를 지지한다.

나는 3% 퇴출제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아니 적극 찬성한다. 이런 제도를 시행하면 불량 공무원뿐 아니라 (후진 상사 아래서 몸부림치는) 창의와 열정이 넘치는, 진짜로 일 잘하는 사람의 퇴출 가능성도 높아지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사회적으로 이런 제도가 정착되면 창의와 열정이 넘치는 사람은 몇 번 쫓겨나지만 반드시 임자를 만나 성공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세훈 보다 훨씬 앞서서, 훨씬 강력한 ‘퇴출’ 제도를 실시한 민간 기업의 경험이다.

 

솔직히 나는 공직사회를 비롯하여 대기업.공기업을 포함한 한국 사회 전체가 영국 축구 리그처럼 -1부 리그 하위 팀 3개와 2부 리그 상위 팀 3개가 자리 바꿈하고, 마찬가지로 2부 리그와 3부 리그, 3부 리그와 4부 리그 간에도 비슷한 자리 바꿈을 한다고 알려져 있다- 오르락 내리락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유능한 도전 세력과 청년 세대에게 기회가 생기고, 창의와 열정이 넘치는 사람이 자기 자리를 빨리 찾아가고, 따라서 사회 전체적으로 활력도 생기고, 고용률(경제활동참가율)도 올라갈 것이기 때문이다. 또 필요하면 헌법이나 법률을 손질하고, 무엇보다도 평가시스템을 정말로 투명하고 공정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고 이명박이 임명한 유모, 박모 같은 또라이 중간 권력들이 자의적으로 사람을 잘라내면 차라리 철밥통을 보장한 현 제도 보다 훨씬 못하다. 또 가능하면 상위직이나 공직에 먼저 적용해야 한다. 상위 공직에 대해서는 민간 전문가에게, 4년마다 심판을 받는 선출직에게 더 폭넓게 개방해야 한다. 당연히 3% 퇴출 제도의 적용을 받는 존재들 또는 선출직의 처우는 더 올려야 하고, 하위 철밥통들의 처우는 점진적으로 동결해야 할 것이다.  고위험 고수익 저위험 저수익의 원칙이 지켜져야 하기 때문이다. 직역간 이동이 쉽도록 공무원연금과 국민연금을 통합하는 것은 기본이다.

 

그런데 나는 3% 퇴출제를 운영하는 선진국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 본 적이 없다. 그것은 아마도 선진국은 공무원의 신분이 한국만큼 안정적이지 않고, (교육기회, 연금, 퇴임 이후 일자리 등을 포함한) 종합적인 처우도 한국만큼 높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한마디로 한국 공무원처럼 청년 인재를 싹쓸이 할 정도로 처우가 높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직역, 직업간 격차도, 노동시간과 고용률(경제활동참가율), 사회안전망도 유럽 선진국 수준에 근접하면 ‘3% 퇴출제’ 같은 이상한 제도는 필요 없을 것이다. 물론 한국의 정치 사회현실을 아는 사람이라면 내가 생각하는 3% 퇴출제는 거의 몽상이라고 하지 않을까? 일리가 있는 판단이다. 당연히 나는 합리적 격차의 구현, 노동시간 단축, 유연안정성 제고, 고용률 상향, 사회 전반적인 역동성.활력.도전 정신 제고(철밥통 타파), 공정성과 투명성 제고 등 전략적 방향성은 흔들림없이 견지하되 정책은 매우 현실적으로 펼칠 것이다. 합법적 수단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끈질기게 법 개정을 추진할 것이다.

 

그런데 오세훈은 헌법, 법률, 평가시스템, 수순 등을 면밀하게 고려하지 않고, 용두사미로 끝날 수 밖에 없는 엉터리 ‘3% 퇴출제’를 흔들어 인기는 챙겼을 뿐이다. 변죽은 ‘3% 퇴출제’로 울렸지만, 실제는 그 이전 정부 때부터 하던 인사혁신-다면평가와 부적격공무원 감찰, 징계 강화-의 성과 일 뿐이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잘못된 지시의 책임을 부하에게 떠넘긴데서 보듯이 자기 반성이 없고3% 퇴출제’나 공무원의 구조적 무사안일에 대한 고민도 너무나 얕다는 것이다. 오세훈의 얘기는 한마디로 공무원의 ‘창의성이 발휘되기 힘든 구조’와 후진적인 조직문화가 3% 퇴출제 등 자신의 인사혁신 정책에 힘입어 획기적으로 개선되었다는 것이다.

 

김문수의 고뇌

세상이 그렇게 만만할까? 여기에 대해서는 김문수의 얘기를 들어보자. 여기에는 김문수의 고뇌가 묻어 있다.

 

김문수는 (한국 공무원 숫자/비율과 관료제도 자체의 효율성 문제를 묻는 조갑제의 질문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효율성에서는 문제가 좀 있다고 봅니다. 부서마다 형평성이 많지 않아요. 어떤 부서는 업무가 과중하게 주어지는 반면에 어떤 부서는 여유가 많고, 하급자들은 비교적 업무가 많은데 중간계급은 부서간 업무량이 정반대가 되어 있기도 하고요. (중략) 그런 면에서 문제가 있지만 공무원의 자질 이라는 면에서는 전세계적으로 보더라도 우리나라가 매우 우수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너무 우수해서 문제지요. 이건 뭐 몇 백 대 일의 경쟁을 뚫고 들어오니까요. 사실 이게 말이 안 되는 겁니다. 공무원의 업무라는 것이 그렇게 우수한 사람들이 할 일은 아닙니다. 창의력보다는 꼼꼼하게 관리하고 집행하는 것이 공무의 본질이니까. 또 다른 문제는 앞장서서 일하는 사람이 없다는 겁니다. 뭐 해서 가져오라고 하면 잘 써서 가져오는 사람들이 없어요. 능력 발휘를 안하는 거지요. 그렇다고 능력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일을 안 해서 그렇지 시키면 잘하거든요.

 

조갑제: 왜 시키면 잘하고 가만 놔두면 일을 안하는 겁니까?

 

김문수: 근데 왜 안 하느냐고요? 할 이유가 없는 겁니다. 일을 열심히 하면 감사를 받고, 감사를 받으면 무조건 손해를 보니 아무런 이득이 없거든요.

 

조갑제: 우리나라 감사원은 공무원이 실수를 했더라도 일을 기획하고 집행한 동기가 좋았으면 그 점을 고려해주는, 그런 융통성 같은 게 없습니까?

 

김문수: 전혀 없습니다. 오직 규정만 봅니다. 규정을 왜 어겼느냐 이것만 따집니다. (중략) 게다가 또 누가 투서를 합니다. 공무원 사회는 내부가 아주 복잡합니다. 위반되는 일은 절대 하면 안 되는 풍토가 거의 완벽하게 조성돼 버린 겁니다. 공무원이 마음먹고 사사로운 이득을 취하자고 나쁜 일을 하는 경우가 아니면, 어지간해서는 절대로 규정을 어기기 않으려고 합니다. 설사 그 일이 아무리 좋은 일이라 해도 말이죠.(김문수.조갑제 책, p 442~443)

 

 

오세훈 생긴대로 논다.

김문수는 오세훈처럼 문제의 뿌리를 그렇게 가볍게 보지 않는다. 단적으로 유능한 인재들이 공무원으로 지나치게 쏠리는 문제에 대해서도 김문수는 한국 공무원이 ‘너무 우수해서 문제다’라고 직설적으로 문제를 제기하지만, 오세훈은 ‘내공이 단단한 직원들이 많은데 다만 조직문화가 문제’다 는 식이다. 물론 오세훈도 뒤에 가서는 ‘적어도 10년 후 서울시의 공무원 사회는 절대로 신의 직장이 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신의 직장을 찾아서가 아니라 사명감을 찾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그 길을 택하는 젊은이들이 훨씬 더 많아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오세훈 책, p197)고 말하기는 한다. 물론 김문수도 오세훈도 한국 사회의 공공부문의 문제에 대해서 근본적인 솔루션의 단초 조차도 보여주지 않았다.

 

전반적으로 김문수는 문제의식의 깊이는 좋지만, 사상이념적으로 조갑제에 너무 가까이 가서 문제인 것처럼 느껴졌다. 오세훈은 책 전면에 걸쳐서 ‘서울시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는데 자신의 창의시정 등으로 인해 엄청나게 좋아졌다’는 자화자찬성 얘기만 늘어놓을 뿐이다.

 

오세훈은 책을 뜯어 보면 볼수록, 거꾸로 도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부여잡고 피땀 흘려보지 않은, 팔자 좋은 남자의 정서와 사고방식이 역력하게 느껴졌다. 생긴 대로 논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두 사람은 차기 혹은 차차기 대권에 상당히 근접한 사람이라는 것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공히 노무현을 자결로 몰고 간 한국 사회의 저 강고한 모순.부조리를 제대로 인식하지도 타파할 것 같지가 않다. 그래서 답답했다. –끝-
http://www.socialdesign.kr

by 김대호 | 2009/10/01 09:57 | 정치와 통계 | 트랙백 | 덧글(18)

송영길의원이 서평을 쓰셨네요.

늦은 밤 웹 서핑하다가, 그러니까 google 검색하다가 우연히 책 서평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송영길의 블로거를 알게 되었습니다.  http://bulloger.tistory.com/tag/%EC%A7%84%EB%B3%B4%EC%9D%98%20%송영길의 정치 톺아보기

과찬의 말씀이지만 노고와 내공을 알아주시는 분이 계셔서 기쁘네요.

009/09/23 11:51

책을 읽는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새로운 세계를 만나는 일이다.
작가와의 간접대화이자 간접경험이다. 새로운 고민과 상상 모색의 순간이다. 나는 부모님께 물려받은 가장 큰 자산이 책읽기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국회의원중에 가장 공부를 열심히 하는 사람, 책을 가장 많이 읽어본 사람, 국회도서관에서 가장 책을 많이 빌려보는 사람중의 하나로 이야기된다. 그런데 국회의원 생활하면서 책을 제대로 정독하기란 독하게 마음먹지 않는 한 쉽지가 않다.

 

김대호 사회디자인연구소 소장이 쓴 <노무현 이후 새시대의 플랫폼은 무엇인가>라는 책을 일요일 하루종일 정독을 하였다. 월요일 오전까지 책을 손에 떼지 않고 다읽었다. 내공이 있는 책이다.

김대호는 진주고를 나와 서울공대에서 학생운동을 하다가 대우자동차에 입사하여 나와 만나게 되었다. 대우자동차 워크아웃과정에서 한국자동차산업구조에 대한 문제의식을 시작으로 한국경제,정치전반에 대한 문제의식을 심화시켜 왔다.

 

참여정부 5년에 대한 수많은 분석과 평가가 있지만 이책이 가장 탁월하게 잘 분석한 것으로 보여진다.

깨끗하고 무능한정치의 도그마에 함몰되어 있는 운동권출신 정치인들에게 강력하고 유능한 정치의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있다. 한국사회의 토대분석을 기초로 정책프랫폼 제시를 하고 있다.

 

경쟁의 입구(경쟁기회,조건,출발선의 평등)관리는 매우 중시하였지만 경쟁의 출구(경쟁결과의 합리적불평등, 즉 사회적 상벌체계)관리와 경쟁목적과 방식의 정합성문제는 등한시해옴을 지적하고 있다.

사회적 상벌체계와 가치생산의 생태계문제등, 내가 평소해 고민해왔던 점을 정확히 정리해내고 있는 것 같다. 특히 참여정부시절 자영업자들에 대한 과도한 세부담 증가가 참여정부의 대중적 기반을 무너뜨리는 중요한 요인중의 하나인 사실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종부세만이 문제가 아니라 재산세과표현실화에 따른 재산세전체의 인상과 신용카드사용증가로 인한 부가가치세 부담증가, 국민연금보험료,의료보험료 부담증가등이 문제가 되었다.

 

세계적인 분업질서과정속에서 한국경제의 가치생산생태계문제는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
남북경제통합속에서 한국경제의 분업구조등에 대한 분석은 생략되어 있어서 아쉬움이 있다.

요즘 책을 쓰고 있다. 국회의원된지 10여년이 다되어가는데 한번도 자신을 정리해보지 못했다. 

내 자신을 정리하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정리하는 책을 쓰고 있다. 시간나는대로 틈틈히 글을 쓰고 있는데 계속적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일정때문에 시간확보하기가 쉽지가 않다.

by 김대호 | 2009/09/30 00:37 | 트랙백 | 덧글(4)

오세훈, 올 가을 태풍과 호우에 정치생명을 걸었나?

[한강르네상스 프로젝트]를 9월 중에 완료하기 위해 지금 엄청난 물량(건설장비와 인력)이 투입되고 있다.

나는 반포대교 인근(집)에서 여의도(사무실)로 자전거로 출퇴근하면서 이 거대한 프로젝트의 진척 상황을 2년째 지켜보고 있다. 

이 거대한 프로젝트가 가꿔 놓은, 부분적으로 완공된 한강 고수부지 공원을 찾는 사람들의 환호와 감탄사를 듣고 있다. 특히 반포대교 난간에서 (수평 방향으로) 쏘는 거대한 분수는 벌써 한강의 명물이 되었다. 조만간 여의도 고수부지 분수를 비롯하여 명물은 더 늘어날 것이다. 이는 오세훈과 한나라당의 엄청난 정치적 자산이 될 것이다.

 

[한강르네상스 프로젝트]는 고수 부지가 크게 조성된 10 곳에서 진행되고 있다. 지구 단위의 핵심 개발 컨셉은 다음과 같다.

 

   1. 강서 : 한강의 대표적 생태 거점화 공간

   2. 난지 : 쓰레기 동산의 환경복원과 첨단 디지털기술이 결합한 엔터테인먼트 파크

   3. 양화 : 선유도, 선유교와 연계한 가족형 휴양공원

   4. 망원 : 동양 최대의 성지 순례지인 절두산성지 등과 연계한 근대역사 관광지

   5. 여의도 : 광역활동 거점으로서의 서울시민 문화 축제마당

   6. 이촌 : 노들섬의 랜드마크적 문화복합단지와 연계한 문화 관광 콤플렉스

   7. 반포,잠원 : 잠수교 보행전용다리를 통해 강남북이 만나는 시민 화합의 마당

   8. 뚝섬 : 수상스포츠로 특화된 청소년 문화마당

   9. 잠실 : 풍부한 문화컨텐츠가 담긴 광역수상교통의 거점

   10. 광나루 : 건강한 생태와 고대 유적이 만나는 시민 체험마당 

 

 

 

 

10개 지구 중에서 여의도와 반포 지구가 가장 장대하고 화려하지 않을까 한다.

여의도 지구의 조감도는 아래 사진과 같다.

 

그 중에서 가장 화려한 지점-거의 완공을 눈 앞에 두고 있다-의 조감도는 아래 사진과 같다. 그 아래 사진은 현재 시험가동하고 있는 분수다.

 

 위 사진에서 보았듯이 고수 부지를 넓게 파서 바닥과 가장 자리에 엄청난 시멘트를 발라서 물길(도랑)을 만들고, 분수를 만들었다.

10개 지구 대부분도 마찬가지겠지만, 여의도 고수부지의 광대한 지역도 시멘트(보도블록 등)로 덮었다. 어쨌거나 분수가 물을 뿜어대고, 아이들이 분수에 들어가 뛰놀고, 연인들이 한강변을 산책하고, 한강에서는 요트가 노는 것을 상상하면 그야말로 멋진 그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왜 역대 서울시장들이 이 프로젝트를 하지 않았을까? 토지 보상비도 거의 들지 않고, 약간의 시멘트와 중장비만 있으면 할 수있는 일을!!

 

결론만 먼저 말하면 나는 한강 고수부지를 자연 그대로 방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환경 친화적으로 개발하고, 후대에 너무 많은 유지관리비를 떠 넘기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오세훈의 개발 컨셉은 이와 분명히 달라 보인다. 

 

세느강, 템즈강과 한강

내가 타고 다니는 버스(정류장이던가?)에는 한강을 파리의 세느강, 런던의 템즈강 처럼 개발한다는 구호가 적혀있다. 누가 만든 구호인지 모르지만 이는 완전히 방향 착오이다. 유럽의 강들은 한강처럼 자주 범람하는 강이 아니다. 강폭은 매우 좁지만 수량은 많고 수위 변화가 별로 없다. 그래서 강 주변에는 국회의사당 등 오래된 건물들이 많다. 그러나 한강은 이들과 매우 다른 강이다. 따라서 세느강, 템즈강 개발 컨셉을 도입하면 안된다. 그래서 뭘 모르는 공무원이 세느강, 템즈강을 들먹였다고 생각하고 싶다.

 

그런데 한강 고수부지를 자전거로 달리면서, 이 프로젝트가 만든 도로, 구조물 등을 보면 기획, 설계자들조차도 한강의 특성; 즉 몇년에 한번 크게 범람하고, 고수부지가 살짝 잠길 정도로 범람하는 것은 그 보다 훨씬 많다는 사실을 깊이 고려하지 않은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사실 나는 도시 공학, 토목 공학, 조경학 등 도시 개발 관련된 지식이 거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상식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오세훈과 시공 회사들은 이런 상식을 별로 반영한 것 같지 않다. 아래 사진은 7월 16일 반포대교 인근 고수부지를 찍은 것이다. 지난 7월 11~14일 서울에 비가 많이 내렸다. 그로인해 7월 12~13일 경 반포대교 인근이 살짝 잠겼다. 물론 물은 금방 빠졌다. 7월 16일이면 물이 빠진 지 48~72시간 가량 지난 뒤였다. 자전거 출근을 위해 반포대교 인근 고수부지에 들어서니 넓디 넓게 조성한 시멘트 광장과 자전거 도로 등에 흙이 최소 5cm 이상 덮인 것 같았다. 그래서 그 전날(7월15일)부터 수많은 중장비와 인력이 동원되어 흙을 밀어내고, 삽으로, 비로, 살수차로 도로를 닦아내고 있는 중이었다.  

 

 

 비, 삽, 쓰레받기, 가레 등을 든 엄청난 인원이 동원 되었다.  

 

고수부지에 도로를 여러 개 만들다 보니(자동차 도로, 자전거 상행선, 하행선, 산책로 등) 흙을 걷어내고 물 청소를 할 곳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도로와 도로 사이는 도로 폭만한 잔디밭이 있다 보니, 중장비로 도로에 쌓인 흙을 밀어내면 두렁이 생긴다. 잔디밭이 망가지는 것은 물론이다. 하여간 쌓인 흙을 처리하는 것이 여간 어렵지 않다.  8월~9월 초에는 7월의 가벼운 범람으로 인해 망가진 꽃밭, 잔디밭을 복구 하느라 꽃과 잔디 심는 장비와 인원도 많이 동원 되었다.

  

 

반포 지구에는 산책하는 느낌을 좋게 한다고 나무로 포장한 길을 만들었는데, 7월 중순의 범람으로 인해 상당 부분 떨어져 나가 버렸다. 완성한지 2~3개월도 안되어 단 한번의 범람으로 망가졌다. 지금 이 나무 길은 시멘트로 덮였다. 이 하나만 봐도, 한강의 특성을 깊이 고려하여 개발 컨셉을 잡은 것 같지가 않다. 

 

누가 디자인했는지 모르지만 반포대교 옆 거대한 광장에는 물의 흐름과 직각 방향으로 (앉아서 쉬기 좋은)돌출 부위를 만들었다. 그 위는 나무로 덮었다. 그런데 완공한지 한달도 되지 않아 범람으로 인해 나무가 다 뜯겨져 나가서 결국 그 부위는 시멘트로 덮게 되었다. 사진은 가벼운 범람 이후 근 보름이 지난 8월 1일에 찍었다. 복구(?) 작업을 한창 하고 있다. 나무에서 시멘트로!

 

 

 

  

한강 고수부지가 생긴 것은 기본적으로 한강의 범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한강이 실어온 토사의 양이 얼마나 많은지는 7월 16일 자전거로 고수부지를 달리면서 실감했다. 사진은 동작대교에서 한강대교 사이(올림픽 대로 아래)의 길이다. 이 길은 자동차 2대가 다닐 수 있는 큰 길이다. 이 길이 끊어지면 한강 고수 부지 길이 끊어진다. 그런데 이 길이 두께 5~15cm의 뻘이 덮었다. 그 아래 사진은 이 길의 끝단인데, 뻘층이 50cm는 족히 되었다. 뻘을 치우던 중장비마저 넘어졌다.

 

 

이 길을 나는 자전거를 들고서 통과했다. 자전거는 호강했지만 나는 무릎까지 푹푹 빠졌다. 이 곳을 통과하니 뻘층이 20~30cm 정도 쌓인 길이 200~300m 이어졌다. 그날 나는 엄청 고생했다. 이 뻘밭을 통과하고 나수 바지와 자전거에 묻은 뻘을 씻어내느라 한강에 들어갔다. 이 도로의 뻘들은 중장비로 밀어버리면 한강으로 쓸어넣을 수 있는데, 그 쪽은 높은 시멘트 턱을 만들어 놓아서 한강으로 쓸어넣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 두터운 뻘층을 걷어내고, 물청소를 통해 완전 원상 회복하는데는 최소 1주일 이상 소요되었다고 알고 있다. 

 

끊임없이 창출되는 삽질 일자리는 오세훈의 선물

사실 한강의 범람으로 인해 자전거 길이 1~2주간 끊어지는 것은 불가항력이다.

정작 심각한 문제는 여의도 주변의 개발 컨셉이다.  여의도 주변에는 멋을 낸다고 분수와 이어진 시멘트 도랑을 길게 팠다.  이 도랑과 분수는 범람으로 인해 토사가 덮였을 때 복구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도로는 그래도 중장비로 흙을 양 옆으로 밀어놓고, 수북히 쌓인 토사를 덤프 트럭에 퍼 담으면 그만이다. 그런데 도랑에 쌓인 토사는 중장비를 쓰기가 곤란하기에-분수 바닥과 도랑 바닥이 깨지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일일이 삽으로 퍼내고, 바닥에 남은 약간(?)의 토사는 비질과 쓰레받기로 제거하는 대역사(?)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진에 삽과 빗자루를 든 사람이 많은 것은 9월21일 약간 내린 비 때문이다. (이 사진은 9월 22일 찍었다) 도랑 구조도 중간 중간 계단과 블록을 집어넣어 쌓인 토사를 걷어내는 작업을 엄청 힘들게 만들어 놓았다. 그래서 7월 중순처럼 한강이 범람하면 여의도 지구 하나에서만 삽질, 비질 일자리 수백개가 만들어 질 것이다. 그러고 보면 오세훈도 이명박 못지 않게 지속가능한 (끊임없이 재생되는) 삽질 일자리를 엄청나게 많이 만들어 낸 것처럼 보인다.  

   

 

 여의도 뿐 아니라 한강 고수 부지 전체에 걸쳐서 자전거 도로와 보행로를 만들었는데, 물빠짐을 거의 고려하지 않아서 약간의 비가 내려도 고인물을 쓰레받기 등으로 퍼내야 하는 곳이 많다. 사진은 물을 퍼내는 장면이다. 그리고 물청소가 어렵다 보니 도로에 붙은 흙먼지는 범람 후 오랫 동안 제거 되지 않았다.  

  

이처럼 [한강르네상스 프로젝트]는 전반적으로 너무 많은 시멘트(보도블록) 광장과 구조물을 만들었다. 도로도 너무 많이 만들었고, 범람으로 인해 쌓이는 토사 대책도 없고, 물빠짐도 고려하지 않았다. 

 

자연 미인의 얼굴에 너무 많은 칼을 대고, 너무 짙은 화장을 하다

[한강르네상스 프로젝트]는 한강이라는 자연 미인의 얼굴에 너무 많은 칼을 대고, 화장도 너무 진하게 했다고 할 수 있다. 환경생태를 대표 상품의 하나로 파는 시장치고는 너무 자연/환경에 반하는 개발 컨셉을 잡은 것이다. 이런 컨셉이라면 향후 한강 공원의 유지 관리비는 보통이 아닐 것이다. 단 한번 범람이 수십억 아니 수백억의 복구 재정을 필요로 할 가능성이 크다. 

 

그런 점에서 올 9월~10월에 태풍과 집중 호우만 없다면 [한강르네상스 프로젝트] 오세훈의 빛나는 치적이 될 것이다. 어쩌면 [한강르네상스 프로젝트]는 이명박의 청계천 같은 존재가 될 지도 모른다. 내가 보기엔 그 규모나 찾는 사람들의 숫자로 보면 이명박의 [청계천]을  능가하지 않을까 한다. 하지만 대단히 씁쓸한 치적이다. 역대 서울의 공간/공공 디자인의 고질병인 과시주의, 단기주의, 얍삽함이 너무 강하게 풍겨 나오기 때문이다.

 

한강르네상스 프로젝트에 대한 심층적인 평가는 조경학자, 도시계획가, 도시(토목)공학자들이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오세훈에게는 다행스럽게도- 그 누구도 내공 있는 평가를 할 것 같지가 않다. 서울시와 한나라당은 이들에게 공사를 발주하는 '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프로젝트의 허점 내지 맹점이 수두룩해도 날카로운 문제제기도 없고, 있다해도 전문가들끼리 숙덕거릴뿐 공론화 되지 않는 것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정말로 양심과 용기가 있는 전문가의 심층 분석과 대안이 아쉽다.

 

그리고 이명박과 오세훈에게 엄청난 정치적 자산을 안겨준,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져 볼 수도 있는 참신한 공간/공공 디자인을 거의 내놓지도 못하고, 내놓을 준비도 안하면서, 이런 피상적인 비판이나 하는 우리가 한심하다. 내년 서울 시장 선거를 어떻게 치를지 걱정이다. 'MB심판론' 만으로는 필패일텐데.......-끝-

by 김대호 | 2009/09/23 18:50 | 서울.코리아 디자인 | 트랙백(1) | 덧글(12)

영국 노동당 18년 광야 생활이 남의 일이 아니다

영국 노동당 18년 광야 생활이 남의 일이 아니다

 

                                          김대호(사회디자인연구소장)

 

-진보의 죽음에 이르는 병-

 

거시적으로 볼 때 정치세력이 몰락하는 것은 전쟁, 내전의 경우를 제외한다면 대개 그 세력을 지탱하는 지역, 산업의 몰락 때문이다. 미시적으로 보면 정치 지도자들의 전략전술적 아둔함())과 小我에 대한 집착()과 유달리 심한 미움() 때문이다. 인류 최고, 최대의 심리학 이론이라고도 볼 수 있는 불교에서는 이를 탐() () () 삼독(三毒)으로 정식화 해왔다. 따지고 보면 이는 시대를 초월하여 인간사의 가장 보편적인 실패 이유이다. 따라서 하나마나 한 진단 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요즈음 민주, 진보, 개혁, 평화를 팔아온, 진보로 통칭되는 정치 지도자들의 행태를 보면 이 케케묵은 진단이 또 다시 생각난다. 2007년에 진보의 지리멸멸 한 모습을 보면서 누군가 바닥인 줄 알았는데 지하층이 더 있더라고 탄식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요즈음 내가 그런 심정이다. 솔직히 나는 부엉이 바위를 진앙으로 한 대지진으로 인해, 거꾸로 도는 역사의 수레바퀴가 멈추었다고 생각했다. 날개 없이 추락하는 진보가 드디어 바닥을 쳤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요즈음의 진보 동네의 모습을 보면 바닥 아래 지하층이 있고, 그 아래 또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모세의 손에 이끌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민족의  40년 간의 광야 생활과 영국 노동당의 18년간의 야당생활이 결코 멀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 40 386들이 60대 노인이 되어, 사실상 정치적으로 퇴물이 되어야 비로서 진보개혁의 새 시대가 열리지 않을까 하는 암울한 생각이든다. (내가 386을 얘기하는 것은 진보의 지리멸멸한 상황을 만든 책임이 결정적이어서가 아니라, 이 상황을 타개할 책임과 힘이 있기 때문이다)

 

국민참여, 시민주권, 민주통합시민행동 유감

부엉이 바위 발 대지진 이후 진보 동네의 정치권을 중심으로 새로운 움직임이 있다. 몇 개의 정치(사회) 단체가 출범했다. 하나는 국민참여, 다른 하나는 시민주권, 또 다른 하나는 민주통합시민행동을 간판으로 하고 있다. 보궐선거와 지방선거 관련해서는 문재인, 한명숙, 김근태, 손학규 등이 거론된다. 물론 민주주의 위기, MB연대는 1년 이상 진보가 합창하고 있다. 진보의 변방에서는 반신자유주의 노래를 10년 이상 부르고 있다.

 

한편 이명박은 지난 1년 몇 개월 동안 오만 가지 악행을 저지르고 나서 이제는 중도실용을, 개헌과 선거법 개혁을 부르짖고 있다. 정운찬을 총리 후보로 내세웠다. 갈지자 행보를 끝낸 듯 이제 자신의 페이스를 찾은 것처럼 순항하고 있다. MB 국정수행 지지율이 놀랄 만한 수준으로 나타나고 있다.

 

내일신문 9 15() 1면 톱에 3040아줌마들 뿔났다는 표제 하에 심상찮은 여론 조사 결과를 실었다. 주목할 만한 것은 남.녀간 엄청난 지지도 격차다. 30대 여성의 MB지지율은 37.9%지만 30대 남성은 59.3%. 40대 여성은 30.6%지만 남성은 58.9%. 이것을 근거로 내일신문은 1면 톱 기사를 그렇게 뽑은 것이다. 그런데 내가 볼 때 진짜 놀라운 것은 3040 남성들의 MB에 대한 엄청나게 높은 지지율이다. 내가 과문해서인지 남성과 여성의 지지도 격차가 이렇게 큰 경우는 별로 보지 못하였다. 실제 이 조사에서도 20대와 50대 이상 연령층은  남녀간에 큰 차이가 없다.

 

 

 

내 기억으로 MB에 대한 국정지지율이 가장 낮게 나온 경우(전 연령 평균 10%이하)는 작년 촛불 시위가 정점에 달했을 때이다. 이것은 MB가 물렁해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에는 전통적인 MB지지층조차 낙제점을 주었다고 알려져 있다. 당연히 MB가 촛불시위 이후 뭔가 강하고 거칠게 드라이버를 걸고, 그에 대해서 진보가 반민주적이다 고 아우성을 칠 때는 오히려 지지율이 30%대로 올라갔다. 한겨레 신문은 MB정부에 대해서 과거 조선일보가 참여정부에 했던 것처럼 해왔다. 최근에는 MB정부의 밀어붙이기 행태를 비난하는 기사를 많이 싣고 있다. 졸속이다. 설익었다. 여론수렴 안 한다. 민주적 절차를 안 지킨다는 얘기다.

 

나는 MB에 대한 한겨레와 진보 동네의 (밀어붙이기 프레임에 입각한) 비판은 이명박 지지율의 특징과 추이의 비밀을 풀어주는 열쇠라고 생각한다. 여성들은 생래적으로 거친 행태나 밀어붙이기 행태를 싫어한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양보, 타협, 절충, 조정이 얼마나 힘든지를 너무나 잘 아는 남성들은 강하고, 과단성 있고, 저돌적이고, 조직 장악력 있고, 일을 할 줄 아는 것 같은 리더십에 대한 열망이 강하다. 나는 2006년 가을 이후 지금까지 지속된 MB에 대한 높은 지지율은 추진력 있고, 일을 할 줄 아는 정치지도자에 대한 대중적 열망의 소산이라고 생각한다.

 

너무나 폭력적인 사회, 한국

한국 사회는 대단히 폭력적인 사회다. 총기 소지가 자유화되지 않은 탓에 물리적 폭력은 심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상식과 정의에 대한 폭력은 대단히 심한 사회임이 분명하다. 진보든 보수든 힘센 집단은 엄청난 폭력이나 공멸의 위기가 도래하지 않으면 자신의 부당한 기득권을 결코 내놓지 않는다. 물질적 이익이 걸려있다면 설득, 대화, 타협, 조정이 상식과 정의 앞에 머리를 조아리는 경우는 별로 없다. 3비층(사실상 실업자, 자영업자, 비정규직)으로 대표되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폭력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우리의 소득 수준에 비해서 형편없는 사회안전망도 극심한 폭력이다. 토건 위주의 재정 할당도, 구조적으로 양산되는 부동산 관련 불로소득도 마찬가지다. 노동의 양질에 비해 형편없는 처우도 정규직/조직노동과 자본이 합작한 극심한 폭력이다. 전임교수의 높은 처우도 시간강사에게는 엄청난 폭력이다. 공무원 철밥통과 좋은 연금제도도 민간과 납세자에게는 엄청난 폭력이다. 공정 경쟁이 되지도 않는 곳에서 자유 경쟁을 부르짖는 독과점 기업, 대기업의 행태도 폭력이다. 정치적 독과점을 보장하는 선거제도도 마찬가지다. 파고 들어가 보면 한국 사회는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상식과 정의가 무자비한 폭행을 당하지 않는 곳이 없다.

 

나는 참여정부와 진보가 형편 없는 보수에게 몇 년째 죽도록 얻어터지고 있는 것은 상식과 정의에 대한 폭력을 너무 많이 방치, 방조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정확히 말하면 실생활과는 다소 거리가 먼, 꽤 제한된 영역에서 상식과 정의를 세우려 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잘 모르고, 당연히 일을 할 줄도 잘 모르는 선량한 사람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MB 정권을 경제성장에 대한 묻지마 열망(천박한 욕망)의 발로라고 해석하는 시각을 참 얕고 편협한 시각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사회의 보수화의 징표로 해석하는 시각도 마찬가지다. 나는 MB정권은 뭔가 일 할 줄 아는 유능한 선수에 대한 열망의 발로라고 생각한다. 강력하고 급진적인 현상 타파 의지의 발로라는 얘기다. 다수 국민들은 모순과 부조리가 얽히고 설켜서 옴짝달싹 도 못하는 상황에서는 강력하고 유능한 선수라야 뭔가를 할 수 있다고 본다. 한마디로 다수 국민은 획기적인 개혁을 원한다. 혁명을 원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7~8년 시점에서는 가장 과감한 개혁을 할 것 사람이 이명박이었다. 구호야 문국현과 허경영이 제일 섹시했으나 한국 대중은 멋들어진 구호에 현혹될 만큼 바보가 아니다. 정치 지도자를 떠 받치고 있는 세력도 보고, 공공 영역에서의 경륜도 본다. 정동영으로 대표되는 진보 집안은 다수 국민들의 눈에는 한마디로 콩가루 집안, 눈 가리고 아웅하는 집안, 끊임없이 자신이 깨끗하다고 하는 집안이었다. 따라서 2007~8년 시점에서 MB와 한나라당은 힘있는 개혁과 진보(현상 타파)를 바라는 다수 국민들의 합리적인 선택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안정희구 심리가 비등했다면 2007~8년의 결과가 나올 수가 없다.

 

나는 이명박과 한나라당이 얽히고 설키고 뿌리도 깊은 강고한 모순 부조리를 일도양단 할 실력 있는 선수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예상보다 훨씬 실력도 없고, 인간성도 더럽다. 하지만 다수 국민들의 시각에서 보면 한국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어디가 급소인지를 좀 아는 선수처럼 보인다. 국민들의 세속적인 욕망-이것이 정치가 가장 중시해야 할 것 아닌가?-을 중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현재까지는 진보개혁으로 오는 돈 줄을 막는 방식으로 진보개혁의 급소를 잘 찌르고, 재정과 규제.처벌권을 활용하여 사리사욕을 채우는데 있어서는 선수라는 것 정도는 확실히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MB와 한나라당에 대해서 다수 국민들은 아직은 기대를 접지 않았다. 다른 대안이 생기기 전에는 3년 정도의  임기가 남은 대통령과 여당에 대한 기대를 쉽게 접지 않는 법이니까. 요컨대 MB와 한나라당에 대한 신뢰가 깊어서가 아니라, 답답한 현실에서 MB와 한나라당 아니면 기대할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MB가 조금만 잘해도 지지율이 쉽게 회복 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이는 진보 동네가 기대를 걸어볼 만한 구석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진보는 데모세력

다수 국민들의 눈으로 보면 진보는 한마디로 데모 세력이다. 데모의 성격은 크게 세가지다.첫째는 상식과 정의(민주주의, 인권, 자주권 등)를 지키는 것이다. 둘째는 생존권을 지키는 것이다. 셋째는 이익집단들이 단결투쟁으로 더 많은 물질적 이익(이권)을 취하는 것이다. 1980년대는 첫째와 둘째가 주류였고 당연히 두터운 국민적 신뢰를 얻었다. 국가와 자본의 전횡이 만연하던 상황에서는 셋째 흐름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20여 년이 흐르면서, 특히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시기에는 셋째 흐름이 주가 되었다. 대기업, 공기업 노조의 투쟁이 데모의 상징이 되었다. 거기다가 국민적 공감대가 얕은 반미연북적 흐름도 가세하였다. 이는 진보의 연성 이미지 및 수박 겉핥기 이미지와 결합하여 데모 세력 전체의 사회적 신뢰를 많이 떨어뜨렸다. 요컨대 다수 국민들의 시각으로 보면 데모(진보) 세력의 이미지도 그리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그런데 보수도 그렇지만 진보도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면서 자아도취하는 경향이 있다.

기업이라는 창을 통해서 세상을 보는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진보는 노조세력과 이미지가 비슷하고, 보수는 경영.관리자와 이미지가 비슷하다. 노조는 회사 전체를 책임지지 않는다. 시야도 좁고, 추구하는 가치도 단순하며, 대체로 방어(딴죽)투쟁이 본령이다. 경영.관리의 전횡이 극심할 때만 임직원 전체의 사랑을 받을 뿐이다. 아무리 저 놈들은 부자들의 이해와 요구를 대변한다고  비난해도 수많은 빈자들이 민노당, 진보신당 등 진보를 외면하는 것은 아무리 어려워도 회사를 경영.관리 능력이 없는 노조세력에게 맡기지 않는 것이 상식이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김영삼은 데모 세력의 무능을 증명했다면, 김대중은 탁월한 국가경영 능력을 증명했다고 생각한다. 참여정부 하에서는 노무현, 열린우리당, 민노당, 노조 등 거의 모든 진보 지도자들이 국민들의 욕망 전체를 어루만지지 못하고, 자신들이 중시하는 몇개의 가치를 추구하면서 선수 이미지를 좀 탈색시켰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가 2007~2008년의 양대 선거 결과가 아닐까 한다. 

선수로 인식되는 것이 관건

진보의 이런 이미지로 보나, MB와 한나라당에게 국정 운영을 맡긴 민심의 흐름으로 보나,   진보가 국가경영권을 다시 쥐려면 보수보다 훨씬 더 국가와 지자체를 잘 경영할 수 있을 것 같은 선수라는 것을 인식시켜야 한다. 복잡다단한 한국 사회(모순부조리 구조)를 더 잘 알고, 창조적 파괴와 건설을 더 잘 할 수 있는 실력 있는 존재이며, 거기에 더하여 높은 도덕성과 고귀한 이상까지 겸비한 정치세력이라는 것을 각인시켜야 기회가 온다는 얘기다.

 

그런데 현재 진보의 머리에는 선수가 되어야 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건설, 창조, 경영 리더십을 강조하는 사람이 없어 보인다. 반면에 깨끗한 사람, 착한 사람, 아름다운 사람, 민주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사람은 부지기수다. 끊임없이 쟤들은 나쁜 놈, 민주적 절차를 무시하고 밀어붙이기를 잘하는 놈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2010년의 주제곡

2006년 지방선거는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에 대한 짜증, 환멸, 응징이 주제곡이었지만, 2010년 선거에서는 MB와 여당에 대한 짜증, 환멸, 응징과 더불어 다른 주제곡이 등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지자체를 잘 지지고, 볶고, 삶고, 데치고, 양념쳐서 주민들이 원하는 맛있는 요리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리더십에 대한 선호이다. 후자가 전자를 압도한다는 것이 아니라 두 개가 똑같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국민들이 MB에게 기대한 파괴, 건설, 창조, 경영(디자인)을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 리더십에 대한 선호가 상당히 강할 것이라는 얘기다. 내가 아는 한 한나라당은 이런 컨셉으로 지방선거를 준비한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진보는 지자체를 어떻게 요리할 것인지를 고민하고 준비하는 사람도 없고, 그런 가치를 별로 중시하지도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를 중시한다면, 정말 아름다운 사람이긴 하지만 선수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이미지를 가진 한명숙과 문재인과 김근태에 그렇게 매달릴 리가 없다. (단적으로 이들이 철밥통에 전문성을 가진 거대한 공무원 조직을 어떻게 다룰 수 있을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또한 지금 국민참여시민주권이니, 민주통합시민행동 같은 노무현의 가치 내지 민주화 운동의 가치만을 주구장창 강조하는 짓을 할 리가 없다.

 

(나는 진보 정치지도자들이 국가와 지자체 경영의 '선수'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그래서 약간의 '선수' 층과 선수를 중시하는 문화(aura)가 형성 되어있다면, 한마디로 실력있는 정치세력으로 인정 받는다면, 이들을 딛고 깨끗하고 부드럽고 아름다운 사람이 후보로 설 수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선수층과 문화와 이미지가 없는 상태에서 부드럽고 아름다운 후보만 덜렁 올라가면 필패의 카드라고 생각한다. 장기적으로 진보의 발전에도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지금은 문재인과 한명숙 같은 아름다운 사람을 잊어야  필요한 시기에 이런 분들이 역사적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국민이 가장 듣고 싶어 하는 말

지금 한국민이 듣고 싶어하는 말은 적어도 국민참여, 시민주권, 민주수호, MB연대, 반신자유주의 보다는 이병완이 용감하게 얘기한 '정치혁명', '교육혁명', '고용혁명', '농업혁명', '에너지혁명' 같은 희망과 비전이다. 이는 실력이나 경륜으로 뒷받침 되어야 한다. 혁명이나 획기적인 개혁이라는 구호는 가능만 하다면 각각 (전문가들과 선수들이 높이 평가하는 책 한 권 분량의) 튼실한 Back data와 알아주는 선수 네트워크가 뒷받침해야 한다. 여기에는 참여정부의 성과, 한계, 오류가 잘 정리되어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또한 김대중정부와 참여정부에서 경험을 쌓은 사람들이 그것이 허황된 것이 아니라고(일리가 있다고) 보증해야 설득력이 배가된다. 이것 없이 참여정부의 핵심들이 혁명이나 획기적인 개혁을 외치면 당신들이 정권 잡고 있을 때는 왜 못했느냐고 힐난하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오죽 사람이 없었으면 그랬을까 하고 이해도 가지만 어쨌든) 이병완과 천호선이 신당의 간판이 된 것은 참으로 안쓰러운 일이다. 새로운 세력이 나서서 튼실한 back data를 기반으로 혁명을 외치고, 참여정부 요직에 있던 사람들은 그것에 신뢰성을 더하는 식으로 가면 훨씬 호소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새로운 세력, 새로운 아이디어도 살고, 참여정부의 경륜도 산다.

 

노동조합과 시민단체를 죽여야 진보가 산다.

나는 진보가 살려면 정치를 하는 사람들의 머리 속에 들어있는 노동조합과 시민(사회)단체를 죽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노동조합과 시민(사회)단체는 더 많아야 하고, 더 활성화/합리화 되어야 하지만 그 철학, 가치, 관성은 진보 정치영역에서는 몰아내야 한다는 얘기다.

 

사실 진보 동네에서 정치를 하는 사람들 상당수는 노동(조합) 운동이나 시민(사회)단체 운동-학생운동 포함-에서 잔뼈가 굵어졌다. 당연히 이 철학, 가치, 관성이 몸에 배이지 않을 수 없다. 노동조합의 생명은 쪽수, 참여, 단결이다. 민주주의 혹은 민주집중제가 핵심 운영원리다. 또한 노동조합은 방어 투쟁기관이다. 기업 경영과 기업 생태계에 대한 책임은 제한적이다. 당연히 그 시야도 제한적이다.

 

시민단체는 민주주의, 인권, 환경, 생태, 노동, 여성 등 한 두 개의 가치를 추구한다. 국가경영 자체를 고민하지 않는다. 국가, 자본 등 힘있는 존재들의 전횡, 일탈, 과속, 무시 등을 견제하고 감시한다. 이상적인 잣대를 가지고 현실의 미진함을 고발하고 항의한다. 수많은 가치 중에서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가 사회 발전의 관건이라고 믿는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 망치를 든 사람의 눈에는 모든 것이 못의 문제로 보인다고, 노동조합이라는 무기를 든 사람의 눈에는 모든 것이 자본의 전횡과 노동의 단결력의 문제로 보이고, 시민(사회)단체의 눈으로 보면 많은 것이 민주주의, 참여, 환경의 문제로 보인다. 이런 시각으로 보면 깨어있는 시민들의 조직된 힘은 크게 보이지만 현명한 정치인/경영자의 리더십(통찰, 결단, 추진력)과 전문가의 컨텐츠는 대체로 작게 보인다. 하지만 보수는 정반대다. 그래서 진보와 보수 둘 다가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노조 지도자나 시민단체 지도자에게는 깨어있는 시민들의 조직된 힘을 압도적으로 중시하는 사고 틀이 아무런 문제가 안된다. 하지만 불의와 싸울 때는 괜찮을지 모르지만, 국가나 지자체 경영(정치)은 복잡한 경영환경을 살펴 정치.경제적 자원을 잘 운용하는 리더십이 절실하다. 노조와 시민단체의 관성을 갖고 있으면 국민들의 세속적 욕망 등 수많은 욕망을 균형적으로 보지 않고 자신이 중시하던 가치만 강조하기 십상이다.(이는 노무현 대통령의 오류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또한 국가와 지자체를 어떻게 지지고 볶고 삶고 데쳐서 좋은 요리를 만들 것인가라는 관점도 잘 체화되지 않는다. 당연히 정무나 마키아벨리즘도 백안시 하기 십상이다. 진보가 다시금 기회를 잡으려면 대중적 힘(참여, 민주주의)을 잘 조직하는 것과 더불어 건설, 창조, 경영을 잘 할 것 같은 리더십과 전문성을 결합해야 한다는 얘기다.

 

그런 점에서 지금 진보에게 필요한 것은 성과를 낸 '선수'(시장, 군수, 도지사, 장관, 관료, 시민단체 지도자, 기업CEO, 학자/연구자 등)들의 모임이다. 이들이 국가와 지자체 경영을 지속적, 체계적으로 논하고 그럴듯한 대안을 내놓아야 한다. 현실에 대한 정확한 진단과 창조적인 대안을 내놓아야 한다. 여기서 무기와 에너지를 공급받은 수많은 시민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그렇다고 지금 하고 있는 노조운동, 시민운동, 정치운동이 무가치하다는 것이 아니다. 시대정신을 체현한, 진보 승리의 관건인 가치를 구현하는 조직/운동/문화가 없다는 것이다. 참여연대를 한국 최고 최대의 시민단체로 만든 박원순은 몇 년 전부터 희망제작소를 통해서 희망과 구체적인 대안을 말해왔다. 박원순의 정세인식, 행보, 성과에 대한 평가를 떠나서 박원순은 그 누구보다도 새로운 시대정신의 한 자락을 분명히 움켜쥐고, 앞장서서 체현해 왔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진보 정치 지도자들은 흘러간 옛 노래(참여, 민주, 반MB연대, 시민주권 등)만 부르거나,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노래(이병완의 5대 혁명론)를 부른다. 여기까지가 진보의 아둔함에 대한 얘기다.

 

소아에 대한 집착

그런데 이 못지 않게 심각한 것은 진보를 대표하는 정치지도자들의 소아에 대한 집착, 즉 탐욕이다.

 

내가 아는 한 가난한 소수파들이 승리하는 비결은 지도자들의 희생(대아를 위해 소아를 버리는 풍모)과 파격적이고 창의적인 전술과 지지자들의 열정이다. 그런데 어찌 된 셈인지 진보 동네는 지지자들의 열정은 변함이 없는데 정치 지도자들의 행태는 졸렬하고 답답하기 그지 없다. 그 어디서도, 그 누구도 창의적이고 파격적인 전술을 하는 것 같지가 않다. 10월 재보선 공천을 다루는 모습을 보면 특히 그렇다. 참여니 시민주권이니 하는 노무현의 몇 마디 말은 차용해서 쓰는 사람은 좀 있어 보이지만, 정작 중요한 노무현의 정신-대의를 위해 대통령직을 던지고, 목숨까지 던지는-과 방법은 그 1/10도 계승한 정치지도자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형편없는 이명박과 한나라당에게 지고 있는 더 형편없는 진보의 지리멸멸한 꼴이 통탄스럽다. 광주항쟁, 6월항쟁,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를 거치면서 아시아 최고의 자유민주 국가를 만든 한국 진보가 이 정도 밖에 안되나!!! 부엉이 바위의 굉음이 아직도 귀에 쟁쟁한데 노무현의 정신과 방법은 어디 갔나!!  18년 아니 40년 광야 생활이 남의 일이 아니다.--

by 김대호 | 2009/09/17 08:24 | 정치와 통계 | 트랙백(1) | 덧글(26)

국민참여정당 성공의 조건(2) -위대한 생각이 무엇이 있나-

                               

                               국민참여정당 성공의 조건(2) -위대한 생각이 무엇이 있나-                               

                                                                                             김대호(사회디자인연구소장)

 

신당(국민참여정당 창당제안모임)은 여태까지 내가 아는 그 어떤 당보다 아는 사람이 많은 당이다. 마찬가지로 내 이름과 얼굴을 아는 사람이 가장 많은 당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신당이 명백하게 잘못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면, 적어도 한번쯤은 성심 성의껏, 가능한 소상히 그 오류를 지적하는 것이 아는 사람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한다. 동시에 여의도에서 정치평론을 조금은 해 온 사람으로서의 회피할 수 없는 의무라고 생각한다. 관심과 애정이 없다면 비판도 없다. 가장 강력한 적의는 침묵과 무시다. 어쨌든 나는 같은 내용을 여러 번 반복해서 비판할 생각이 없다. 이제 당분간은 신당에 대해서 글을 쓰지 않을 것이다. 이 글도 두세 개로 쪼개서 올릴까 하다가 신당에 대한 유감이자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책무를 이번 기회에 확 털어버리고, 연구소가 하기로 한 사업에 집중하기 위해 장문의 글을 그냥 올린다. 호흡 짧은 독자들에게는 별로 친절하고 싶지가 않다.

 

나는 신당제안 모임이 제시한 창당 제안문, 10문10답집, 팜플렛(신대한민국 여권), 인터넷에 공개된 발기인 이력 등 공개된 자료만을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그 중에서 창당제안문과 10문10답을 주요하게 분석했다. 이 글에는 신당을 추진하는 사람들의 생각의 정수가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창당과 관련해서 필요한 말이 무수히 많은데,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말 안 했는지, 무엇을 강조하고 무엇을 강조하지 않았는지를 뜯어 보면 신당의 철학, 가치, 이념, 정서의 대강을 알 수 있다. 신당은 ‘참여’에 대한 강조, 국가/사회 비전이나 핵심 정책은 발기인 토론으로 넘긴데 반해, 지배구조, 대의원 제도 철폐, 16개 시도당 별 조직 등은 창당제안문(참여자와 제안자의 계약서)에 명시하므로 서 엄청나게 많은 것을 말하고 있다.

 

결론만 먼저 얘기하면 신당의 핵심 문제는 주요하게 표방하는 가치(참여)와 조직/지배 구조와 문화가 세 칸 오두막 이상이 되기 힘들다는 것이다. 사실 ‘참여’라는 가치는 참여정부처럼 ‘국민들이 주인적 자세를 가지고 여럿이 함께 좋은 사회를 만들어 나가자’는 식으로 쓴다면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이런 의미라면 ‘참여’는 ‘민주’나 ‘시민주권’이나 ‘연대’처럼 너무나 보편 타당한 가치가 된다. 그런데 당의 문턱을 낮추고, 대의원제도를 없애고, 인터넷과 핸드폰 등을 활용하여 참여자의 발언권, 결정권을 폭넓게 보장한다는 이유로, 다른 당은 소수 유력자가 주인인데 반해 신당은 국민이 주인이라는 식으로 얘기를 한다면 ‘참여’는 버리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대역죄’를 범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어쨌든 ‘참여’에 대한 과잉 의미 부여(도깨비 방망이처럼 생각하기)는 당내에서 풍성한 토론이 벌어지면 바로 잡히리라 생각한다. 문제는 창당 제안문이라는 계약서에 들어있는 조직/지배구조이다. 이는 새로운 사람들과 리더십이 들어오는 것을 원천 봉쇄하는 것이다. 그래서 세 칸 오두막 구조를 혁파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조직/지배구조를 혁파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편 문화를 바꾸는 것은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이다. 문화는 많은 사람이 들어와서 장시간 교제하고 활동하지 않으면 바뀌지 않는다.

 

전반적으로 신당이 제시한 문건은 여태 내가 본 많은 정치결사(정치조직) 중에서, 표방하는 논리의 외적(현실적) 정합성은 접어두더라도 내적 정합성이 좀 떨어지는 편에 속한다. 현실(의도)과 논리(표현)의 모순이 많기 때문이다. 

 

대의원 제도 철폐 문제

신당의 조직(지배) 구조상 뚜렷한 특징 중의 하나는 “대의원 제도를 두지 않고 중요한 정치적 선택과 핵심 정책을 국민 토론과 당원 직접투표로 결정”한다는 것이다. 이 결정권은 “당비를 내고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당원들에게 그에 부응하는 권리”로 확실히 부여된다고 한다. 

 

분명한 것은 어떤 정당이든지 당원으로서 권리와 의무가 명확하고, 권리(선거권, 피선거권)를 의무(당비 납부, 활동참여)와 긴밀하게 연동시키면, 초기에 당의 재정적, 인적 기반이 튼실해질 가능성이 높다. 물로 반대 급부로 평소 의무를 전혀 이행하지 않은 단순 지지자들을 당의 중요한 결정(공직 후보자 선출 등)에 참여시키는 것은 어렵다. 따라서 중요 공직 후보 결정시에 국민경선(오픈 프라이머리) 형태를 취하기 어렵다. 단적으로 기간 당원이 5만 명이 넘은 민주노동당과 기간 당원이 20만 명이 넘은 프랑스 사회당은 2007년에 당내 경선을 통해서 대통령 후보를 선출하였다. 하지만 새천년민주당과 미국 민주당은 기간당원이 명확하지 않았기에 국민경선(오픈 프라이머리) 형태를 취하여 당심과 민심을 근접시켰다.  2002년 당시 당내 기반이 약한 노무현은 이런 방식으로 대통령 후보가 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미국 민주당이나 새천년민주당 방식이 더 낫다고는 할 수 없다. 일장일단이 있기 때문이다.

 

가장 좋은 것은 평소 국민을 잘 섬기는 기간당원 중심으로 운영하다가 결정적인 시기에 오픈 프라이머리를 취하는 것이다. 그러나 몇 년 동안 당원으로서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한 당원들과 이들을 딛고 서 있는 계파 지도자들의 반발을 무마하는 것이 그리 간단치 않다는 것이 통설이다. 분명한 것은 현재의 신당 시스템을 유지한다면, 즉 권리와 의무를 긴밀히 연동시키면, 정작 민심과 당심을 일치시켜야 할 중요한 당내 선거를 치를 때, 신당은 당심을 좇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게 되면 국민참여정당이라는 이름이 무색해 질 것이다. (내가 앞에서 신당의 문턱이 결코 낮아지지 않았다고 한 이유 중의 하나는 이것이다) 신당의 이런 시스템은 가뜩이나 당의 주인이 되고 싶어하는 열망이 강하고, 또 권리를 주지 않으면 의무를 잘 이행하지 않는 문화에 익숙한 사람들로 당의 초기 동력을 구성하는데 따른 반대 급부가 아닐까? 그런데 참여연대, 희망제작소 등 시민단체의 후원자와 자원봉사자들은 가치와 사업과 리더십에 공감해서 지지, 성원, 참여 할 뿐, 권리와 의무를 긴밀히 연동시키지는 않는다.

 

어쨌든 대의원제도를 두지 않는다는 것은 신당이 힘주어 강조하는 조직/운영원리이다. 그런데 대의원 제도는 당원수가 적고, 결정해야 할 사안이 단순하고, 인터넷, 휴대폰 등 정보통신기술을 커뮤니케이션 도구로 잘 활용하면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결정해야 할 사안이 많고, 복잡미묘하며, 당원수(열성참여자 수)가 많으면 사정이 달라진다. 이런 경우 대의원제도가 없어지면 복잡미묘한 사안은 대부분 지도부에게 일임되지 않을 수가 없다. 만약 복잡미묘한 사안이 전 당원 토론 및 투표에 부쳐지면 (인터넷 상에서) 집요하고 목소리가 큰 사람의 영향력이 커지지 않을 수가 없다. 요컨대 대의원 제도가 없으면 당이 양, 질적으로 성장했을 때는 최고 지도부와 소수의 선동가가 좌지우지 하는 당이 된다는 것이 상식이다. 그렇게 되면 ‘당원이 주인’이라는 신당의 대표 상품은 빛을 잃게 되어있다.

 

그리고 원초적으로 대의원제도는 단지 정보통신기술의 미발달의 산물 만은 아니다. 토론과 결정의 효율성과 효과성 제고, (현실이나 전체를 고려하지 않는) 목소리 크고 집요한 구성원에 대한 제어(포퓰리즘 제어) 등도 있다. 이는 공화주의의 철학적 기초의 하나이다. 요컨대 신당이 평범한 당원이라면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사안만 다룬다면 대의원제도는 필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총회시 의견 블록을 만들겠다는 것도, 가두투쟁을 조직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정권을 잡겠다는 당이 처리해야 할 복잡미묘한 사안이 좀 많을까?

 

대의원제도는 조직이 양적, 질적으로 성장하면 반드시 필요하다. 조직이 왜소하면 여건에 따라 만들어 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요컨대 대의원 제도 유무는 전술적, 기술적 사안이기에, 대의원 제도가 없다는 것이 간판 상품이 되면 곤란하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이를 앞세운 이유가 무엇일까? 추측하건대 참여자, 당원이 주인이라는 것을 강조하거나 과시하는 효과를 노린 것이 아닐까? 이는 철학, 가치, (국가 개조의) 비전, 정책이 조직의 영혼이 되지 않고, 당원이 주인이라는 컨셉(권력 구조)이 조직의 영혼이 된 특이한 정치조직의 불가피한 행보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내가 아는 상식은 당원이 주인이라는 말은 ‘대한민국은 국민이 주인’이라는 말처럼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린 말이다. 대한민국은 국민이 주인인 것은 맞지만 대체로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것은 소수의 유력자들(정치인, 언론사, 재벌대기업, 이익집단 등)이다. 그처럼 신당도 열린우리당, 새천년민주당, 민주노동당, 진보신당과 마찬가지로 당원이 주인인 것은 맞지만 소수의 지도자가 당을 좌지우지 하게 되어있다. 이는 정치학의 상식이라고 알고 있다.

 

어쨌든 도덕성을 엄청나게 강조하는 사람은 사소한 도덕적 불찰에 큰 상처를 입기 마련인 것처럼, ‘당원 주인론’을 대표상품으로 내세우는 조직은 운영 과정에서 의외로 큰 상처를 입기 마련이다. 조직 운영 과정에서 때때로 지도자들의 결단 내지 과두제적 운영이 필연이기 때문이다. 강조할 필요가 없는 것을 생명처럼 너무 강조한다는 얘기다.  

 

분권형 지배구조 문제

신당의 조직 구조상 또 하나의 뚜렷한 특징은 “시도당이 스스로 지역 정책을 결정하고, 공천을 자율적으로 관리”하며, “중앙 아래에 지방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지방이 연합하여 중앙을 구성”하며, “당의 최고 지도부에는 직선으로 선출된 16개 광역시도 대표가 참여”한다는 것이다.

 

대의원 제도가 없는 상태에서는 의도와 달리 최고 지도부의 권능이 매우 커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은 앞에서 얘기하였다. 그리고 지방 분권적 요소가 강한 조직 구조에서는 지방당 조직을 안정적으로 이끌고 있는 최고 지도부 성원의 권능이 매우 크고 안정적일 수밖에 없다. 창당제안문에는 광역시도당 대표는 자체적으로 선출하고, 이들이 사실상 공천권을 가진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방당이 수평적으로 결합하여 중앙을 구성하는 방식을 취하면(아무래도 동등한 발언권을 행사하기 십상이기에) 인구가 천만이 넘는 서울, 경기에 비해 훨씬 작은 인구를 가진 제주(55만) 울산(102만) 광주(145만), 강원(147만) 등 지방당 지도자(지방 맹주)의 권능이 여간 큰 것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신당의 지배구조는 지방당과 그 지도자의 이해와 요구가 철저하게 반영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이런 구조가 광범위한 국민들의 참여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알 수 없다. 지방 활동가들의 참여와는 관련이 좀 있어 보이지만……

 

16개 광역시도당 별 조직 구조 문제

젊은 유권자나 진보, 개혁 성향 유권자들은 원래 지역에 대한 이해관계나 소속감은 약하다. 직업, 직장, 취향, 배우자/육아, 교육 조건 등을 따라서 마음대로 돌아다닌다. 구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광역 지자체도 바꾼다. 경기도에 살다가, 인천으로 이사하고, 다시 서울로 이사 가기도 하고, 광주에서도 살다가 전남에서도 산다. 높은 이동성과 지역에 대한 상대적 무관심은 유럽, 일본, 미국과 확연히 다른 한국인(젊은 유권자)의 특징이다. 당연히 관심 범위와 사고 방식이 전국구인 사람이 많다. 또한 상대적으로 직업, 직능적 이해관계가 강하다. 자신의 이익 여부와 상관없이 불의는 성토하고 정의는 찬양한다. 그래서 물질적 이익을 줄 것 같지 않는 노무현에 대해서 열광한 것 아닌가? 또한 진보, 개혁 성향의 유권자들 상당수는 네티즌으로 활동한다. 따라서 웹 공간에서는 진보.개혁 성향-민노당, 진보신당 성향이 아니다-이 압도적으로 강하다.

 

반면에 보수의 핵심 세력들은 대체로 이익이나 이권을 쫓는다. 이들은 재정, 자리나 정부의 규제/촉진권을 활용할 줄 안다. 한마디로 재정을 해먹을 줄 안다고 할 수 있다. 당연히 재정이 흘러가는 길에 포진해 있다. 이 길은 주로 지역이다. 선거구와 일치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웹 공간에서는 약세지만 선거가 치러지는 지역에서는 그 영향력, 조직력이 막강하다. 정보도 적고 판단력도 취약한 약간 어리버리한 계층을 잘도 동원한다. 그래서 네티즌이 힘을 발휘하기 힘든 지방선거에서는 영. 호남 가리지 않고 해먹을 줄 아는 지방 토호(주로 토건족)들의 점유율이 점점 높아져왔던 것이다.

 

요컨대 내 얘기는 진보.개혁 성향 유권자들을 조직하려면 16개 광역시도별 당 조직도 필요하지만, 선거구별, 직능 별, 이슈(가치)별 조직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특히 진보.개혁을 표방하는 정당은 직능 별, 이슈(가치)별 조직이 강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진보.개혁 에너지를 담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진보가 그렇게 예찬하는 다양한 촛불 시위는 수많은 사람들이 주요 광역시의 중심지에 집결하긴 했지만 그 뿌리는 수많은 온.오프라인 모임(쌍코와 화장발로 대표되는 인터넷 까페/동호회, 동문회, 생협, 노조 등)이었다.

 

그런데 창당제안문에는 광역시도별 조직이 골간으로 명문화되어 있고, 이 단위가 지도부의 압도적 다수를 배출한다. 이는 정말 진보.개혁 정당과는 정말로 어울리지 않는 조직구조이다. 백 보 양보하더라도 16개 광역시도별 조직 구조 역시 대의원 제도 철폐처럼 창당선언문에 명기될 사항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조직구조는 얼마든지 유연하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당 참여와 동시에 16개광역시도 별 조직구조와 독특한 지배구조를 승인 받으려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친노 정당(노무현의 정신, 방법을 체현한 정당)이어서 혹은 당원이 주인인 정당이어서 지지하고 가입하는데, 이와 별로 관련이 없는 조직/지배 구조를 패키지로 승인 받으려 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이런 사안이야말로 전 당원 토론 사항이 아닐까 한다.

 

왜 지금 신당인가에 대한 설명

창당 제안문은 지금 신당 창당의 절박성을 이렇게 정리하였다.  

“이번에 창당하지 않으면 다음 총선 전에나 가능”할텐데, 그 때가 되면, “대선 후보들의 영향력이 너무 커져서 국민과 당원이 주인인 정당”을 만들기가 어려운 상황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 말도 다수 국민들이나 유력 정치인 팬클럽 사람들에게는 난해하다. 왜 대선 후보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이 문제인지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사실 국민 모두가 당원이 될 수 없는 노릇이기에(더 정확히 말하면 아주 특별한 사람만 열성적으로 활동하는 당원이 될 수 있다) ‘국민이 당의 주인’이라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중요한 것은 대선 후보가 당의 사실상의 주인이냐 아니면 다수의 기간당원(열성참여자) 혹은 이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무명의 지도자들이 당의 사실상의 주인이냐는 것이다. 물론 형식적으로는 당원이 주인이 아닌 당은 없다. 현재 민주당 조차도……그런데 국민들은 당의 실질적인 주인이 누구인지는 별 관심이 없다. 거듭 말하지만 국민들은 정당의 조직 형태가 기간당원이 주인인지, 1인 보스가 주인인지는 관심이 없다. 마치 기업이 노동조합이 있는지 없는지, 종업원 지주제를 실시하는지 않는지, 족벌 경영을 하는지 전문경영인이 경영하는지 관심이 없고 그 상품.서비스의 품질과 가격에 관심이 있는 것처럼…… 물론 가능하면 노동조합도 있고, 민주적으로 운영되고, 전문경영인이 경영하고, 환경보호 등 사회적 책임도 잘 이행하는 기업을 좋아한다. 하지만 이 가치들은 어디까지나 생산하는 상품.서비스의 품질/효용과 (라이프 싸이클 전체에 걸친) 가격 보다 우위에 오지는 않는다.

 

이처럼 국민들이 정당에 대한 관심의 핵심은 국민을 잘 섬기느냐 않느냐이다. 국민의 요구, 불만, 고통에 제대로 반응하느냐 않느냐이다. 종업원 지주제가 잘 실시되는 기업이 소비자를 잘 섬긴다는 보장이 없는 것처럼, 다수의 기간당원의 발언권과 결정권이 센 정당이 국민을 잘 섬긴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분명한 것은 기간당원(열성참여자)들과 이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이 있는 무명의 지도자들이 평소 국민을 잘 섬겨왔다면, 국민들은 이런 사람들이 실질적인 주인인 정당을 지지하고 신뢰할 것이다. 따라서 제안문의 주장; (다음 총선 전에는) “대선 후보들의 영향력이 너무 커져서 국민과 당원이 주인인 정당을 만들기가 어려운 상황”을 우려하면서 지금 태동하는 신당에 아낌없는 지지와 신뢰를 보낼 것이다. 나 역시 작은 힘이나마 보탤 것이다. 그런데 과연 기간당원들과 무명의 신당 지도자들이 (비록 국민들은 잘 몰라도) 알만한 사람은 알 정도로 국민을 잘 섬겨왔던가? 시대정신을 잘 읽고 구현해 왔던가? 참여정부의 성과와 노무현의 합리적 핵심을 잘 계승하고, 그 한계와 오류를 뛰어넘으려는 노력을 치열하게 펼쳐왔던가? 나는 도통 알 수가 없다. 국민들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결론적으로 기간당원들과 신당 지도자들이 대권 후보들을 능가하는 지지와 신뢰를 받지 못한다면, 이 제안문은 아무런 감동이 없는 말이다. 오히려 기간당원들과 신당 지도부의 권력 욕의 발로로 보이지 않을까?

 

어떤 사람은 신당을 자꾸 유력 정치인과 연관시키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창당제안문에 나타난 신당의 조직/지배 구조와 정신을 보면 신당의 실질적인 주인은 기간당원(열성참여자)들, 좀 좁히면 최고 지도부, 더 좁히면 거기에 들어가 있는 지방당 지도자들이다. 신당이 제시한 문건에는 이들이 수도권 세력이나 유력 정치인에 휘둘리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컨트롤 하는 주인이 되고자 하는 욕망과 기백이 진하게 베여있다. 이것이 감동을 주는지, 오버(over)인지는 독자가 판단할 일이다.

 

나는 지난 2004~2008년, 그 좋은 시절 대권 후보 급들이 보여준 졸렬한 모습에 이만저만 실망한 것이 아니다. 이 실망은 열린우리당에서 ‘참여’(기간당원제 사수)를 외치며 투쟁해 온 사람들도 비껴가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이들을 정신적으로, 정치적으로, 정책적으로, 조직적으로 압도하는 정치조직의 출범을 학수고대해 왔다. 아니 지난 몇 년 간 나는 그런 정치조직(정치조직에 필요한 부품=컨텐츠)을 만드는데 일조하겠다는 일념으로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냉정하게 평가해보면 나를 포함하여 제대로 된 정치조직을 만들어 보겠다고 나선 사람들의 성과는 보잘것없다. 그렇다고 해서 내 소망과 시도를 접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초라한 중간 성적표를 들고 진짜 시험장에 들어간다면 당연히 실력만큼 성적을 받을 생각을 해야 한다. 실력 이상으로 성적을 받으려 하면 부정행위를 하는 수 밖에 없다. 요컨대 나를 포함한 무명의 활동가들은 정당을 만들거나 참여할 때는 자신의 총체적 실력(역량)에 상응하는 만큼의 권능을 행사해야 한다는 말이다. 김대중과 노무현의 정신과 방법을 계승하고, 높은 국민적 대중적 인지도와 신뢰도가 있는 사람이라면, 그래서 국민의 첫 번째 종이 될 역량을 갖춘 사람이라면 마땅히 그의 기여, 실력에 상응하는 만큼의 권능을 행사하도록 해 주어야 한다. 나는 이것이 국민의 뜻이자, 국민을 주인으로 섬기는 태도라고 생각한다.

 

아쉬운 형평(공평) 감각

사실 나는 신당(사람들)을 볼 때 제일 아쉬운 것이 형평 감각이다. 지난 열린우리당에서 ‘참여’(기간당원제 사수)를 외치며 투쟁한 사람들이 자신의 실력에 맞는 수준의 요구를 했더라면, 그래서 시간을 두고 당을 장악하려는 시도를 했다면 열린우리당이 그렇게 허망하게 깨지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설사 깨졌다 하더라도 그 후신인 지금 민주당이 당원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평당원의 영향력도 거의 없고, 특정 지역 출신 연로한 사람들이 당의 하부를 구성할 정도로 퇴행하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어차피 시간이 참여를 외치는 젊은 사람들의 편이었으니 시간이 가면서 점점 유리한 정치적 입지를 확보했으리라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나는 신당의 구조와 리더십과 문화를 보면 역량에 비해 욕심이 너무 크다는 것을 느낀다. 그래서 누가 나보고 이름대면 알만한 유력 정치인의 참여 여부를 가지고 10만원 내기를 한다면 나는 신당의 환골탈태 없이는 절대로 유력 정치인이 참여하지 않는다는데 10만원을 건다. 아니 참여정부와 무관한 명망 있는 교수, 전문가 등도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는데 10만원을 건다.

 

신당의 유전자 형성 방식

소수가 특정한 철학, 가치, 비전을 공공연하게 표방한 운동을 통해서 조금씩 조금씩 사람을 모았다면, 또 그 과정에서 표방하는 바를 검증, 발전시키고, 리더십을 재구축했다면 조직의 유전자는 폭발적 증식 가능성을 가지게 된다. 그런데 신당은 이런 과정을 밟지 않았다. 신당은 공공연한 운동 없이 전화로, 이메일로, 인적 접촉으로 전국적으로 1642명을 결집시켰다. 그것도 대단히 특이한 창당선언문으로! 이는 여간 경이로운 일이 아니다. 당연히 외부자들은 도대체 무엇이 이들을 불러모았을까, 이들이 공유하는 철학, 가치, 문화, 역사, 경험 등이 무엇인지 궁금해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세상이 다 아는 일이지만 1600여명의 상당수는 지난 몇 년 간 ‘참여’를 내걸고 숱한 전투를 치른 전우들이라고 할 수 있다. 참정연, 참평포럼, 참여정부 활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얘기다.

 

참여를 표방한 이 조직/운동들이 다 실패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짙은 그늘 내지 심각한 오류가 있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가 없을 것이다. 물론 진보, 개혁 진영 전체가 마찬가지였지만…… 어쨌든 ‘참여’를 내건 전투에 함께 했던 사람이 아니라면 전우애가 돈독한 창당 주체들이 이 조직/운동의 한계와 오류를 어떻게 반성했는지를 주의 깊게 살펴보지 않을 수가 없다. 지난 조직/운동이 별 문제 없었다거나-저 간악한 무리들 때문에 실패했다고 보거나- 한계와 오류를 성찰하지 않는 문화라면 새로운 참여자가 붙기가 매우 힘들다고 보아야 한다.

 

만약 창당 제안(주체) 세력이 과거의 조직/운동을 제대로 성찰하지 않는다면, 전우가 아닌 사람들의 눈에는 이들은 ‘여호와의 증인’처럼 자신들만의 독특한 철학, 가치, 문화를 공유하는 소수 집단처럼 비치게 되어있다. 어찌 보면 창당 제안(주체) 세력을 ‘참여 정치의 증인’들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물론 이들이 시대와 국민이 요구하는 가치의 증인들이라면 엄청난 지지와 신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참여라는 가치는 그 정도는 아니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노무현에 대한 500만 추모 민심이 ‘참여’를 앞세운 조직/운동에 대한 지지로 조금은 올 수 있겠지만 많이 올 것 같지는 않다.

 

물론 나는 신당이 ‘참여 정치의 증인’들이라고 해도 충분히 의미 있는 조직이라고 생각한다. 양당 구도를 흔들 수 있는 제대로 된 정당 건설의 한 블록으로서 존재 의미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들이 그 정당의 중심이 되려고 한다면 글쎄다.

 

나는 궁궐에 비유할 수 있는 제대로 된 정당은, 그것이 지하당이 아니라면, 태동단계부터 10명이 모이든, 20명이 모이든 그 가치와 노선을 공공연하게 표방하고, 대중적 검증, 토론과 작은 실천을 거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작은 회오리 바람이 국민적 지지와 신뢰 에너지를 모아 거대한 토네이도로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조직의 유전자를 형성할 때부터 참여를 제대로 조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신당은 과거 고립분산적인 민주/민중 운동이 전국조직을 형성할 때 그랬던 것처럼 지역별, 직능 별로 독립적인 신당 추진체(운동체)를 만들고, 각각이 내부 토론을 통해서 조직의 유전자(이념, 조직/지배구조, 리더십, 문화)를 형성하여 전국 단위 토론을 통해서 이를 발전시키고, 통일시키고, 공유하는 프로세스를 밟았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지금처럼 ‘참여 정치의 증인’들의 핵심들이 모여서 유전자를 형성하여 ‘짠’하고 나타나는 방식이 아니라!

 

신당의 위대한 생각은 무엇인가?

신당의 조직적 확장이 쉽지 않은 것은 무엇보다도 신당의 주인과 조직의 유전자가 명확하고, 그것이 국민을 잘 섬기는 첫 번째 종으로 발전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조직/지배 구조에 창당 주체들의 협소한 안목과 이해관계가 너무 강하게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초가 삼칸을 지었다고 한 것은 가치 측면에서도, 조직/지배구조 측면에서도 ‘참여 정치의 증인’이 아닌 사람들에 대한 흡인력이 너무나 약하기 때문이다.

 

정말 신당에는 국민에게 감동과 기대를 줄 수 있는 위대한 생각이 없다. 위대한 생각 없이는 위대한 정당과 나라는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상식이다. 신당에는 힘센 정치세력(민주당 호남파, 수도권 정치세력)에 의해 휘둘리고, 내쫓기고, 무시당한 사람들의 권력의지 내지 방어의지가 강하게 드러나 있다. 정당의 주인이 되려고 하는 의지도 강하다. 이는 참여와 집단지성에 대한 과도한 신뢰와 연결되고, 나라를 정확히 알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던 김대중과 노무현의 정신과 방법을 멀리하도록 만들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신당은 완전히 새로 설계하지 않는 한 한나라당, 민주당, 민노당, 진보신당이 흡수하지 못하는 엄청난 정치적 에너지를 흡수할 수가 없다. 유력 정치인들과 새로운 정치를 할 수 있는 새로운 사람들은 결코 신당에 합류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신당이 거대한 궁궐로 발전하려면 참여를 중심에 놓으면 안 된다. 국가/사회 비전을 중심에 놓아야 한다. 또한 무엇보다도 창당 주체 세력이 정당의 주인이 되려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 열성적인 참여자, 최고지도부, 지방정치조직 지도자들의, 신당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국민을 진정한 주인으로 섬기는 열정과 지혜로 바꾸어야 한다. 그리하면 원하지 않아도 시간이 흐르면 신당은 거대한 궁궐로 발전하고,창당 주체 세력은 그 궁궐의 주인이 되어 있으리라 생각한다. –끝-

 

사족

모르겠다. 표방하는 바와 달리 애초부터 작게 설계된 정당에 대해서 작게 설계 했다고, 쓸데없이 긴 비판을 늘어 놓은 것이 아닌지? 어쨌든 지금 대한민국은 양당 구도를 크게 흔들 수 있는 새로운 정당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진보, 개혁 진영은 민주당의 환골탈태가 희망이 될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새로운 정치세력이 땅에서 솟아나지 않는다면 초가 삼칸 신당의 환골탈태가 희망이 될 수밖에 없다. 물론 희망이 없는 민주당과 신당이 아옹다옹 다투는 꼴을 가슴 쥐어 뜯으며 지켜보는 상황이 전개될 가능성이 높다. 대한민국으로서는 슬픈 일이고, 한나라당과 조중동으로서는 기쁜 일이다. 제발 이런 꼴은 보지 않기를!

 

by 김대호 | 2009/09/09 15:10 | 정치와 통계 | 트랙백 | 덧글(3)

국민참여정당 성공의 조건(1)-참여를 버려야 한다-

국민참여정당 성공의 조건(1)-참여를 버려야 한다-

 

이 얘기는 국민참여정당 창당제안모임(handypia.org)-이하 신당-에 좀 불편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신당의 성공의 조건 중의 하나가 분명한 것 같다.

 

불편한 얘기를 하기 전에 먼저 밝혀 둘 것이 있다.

첫째, 나는 신당이 민주세력의 분열을 의미한다는 주장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지금 문제는 민주, 진보, 개혁을 팔고 있는 가게들이 하나 같이 손님이 적어서, 이들을 다 합쳐도 시장 점유율 측면에서 보수 가게에 한참 뒤떨어진다는 것이다. 손님이 적은 이유는 기본적으로 가게들이 국민의 요구, 불만, 고통에 제대로 반응하지 않고, 또 제대로 반응할 수 있는 실력을 기르려고 노력하지도 않고, 자신들의 얼마 되지도 않는 기득권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로운 손님을 끌어들일 수 있고, 기존 손님으로부터 더 돈독한 사랑을 받는 새로운 정치 가게 출현의 당위성은 명명백백하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신당이 새로운 고객을 끌어들일 수 있는 상품을 준비하지도, 팔지도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유력한 경쟁 정당이나 작지만 기세가 좋은 괜찮은 정당 없이는 민주당의 환골탈태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생각한다.

 

셋째, (몽상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어쨌든) 명망가 없어도 얼마든지 괜찮은 당을 할 수가 있다고 생각한다.

 

넷째, 국민과 당 사이에 있는 문턱을 낮추고, 당의 반응성을 강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다섯째, 발달된 정보통신 기술을 최대한 활용하여(핸드폰, 당 홈페이지, 이메일, 블로그 등) 당원의 교양 수준을 높이고, 당내 민주주의를 강화하고, 대중과의 접촉면을 넓히는 것은 현대 정치조직의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신당은 민주당의 인터넷 관련 활동을 강화하는데 좋은 자극제가 될 것이다.

 

여섯째, 새로운 정치와 정당을 하겠다는 삼십 대와 사십 대의 씨가 마른 상황에서는 신당 참여자들은 작지만 너무나 소중한 에너지라고 생각한다. 가난하기 짝이 없는 진보 집안이 가진 소중한 자산인 만큼 반드시 작은 성취의 경험을 공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 글의 요지도 먼저 밝히겠다.

첫째, 신당의 대표 상품인 참여를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 대신에 국민의 요구, 불만, 고통에 제대로 반응하는 가치와 비전을 앞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국가, 어떤 사회를 만들지(비전)가 앞에 오고 참여는 뒤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참여는 결코 당의 간판 상품이 되어서는 안 된다.

둘째, 지방분권형 지배구조, 기간 당원 중심 시스템, 독특한 문화 등을 국민이 요구하는 가치 중심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국가경영 실력(경륜)을 중시하는 리더십, 시스템,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이 얘기는 다음 편에서 하려고 한다)

 

현재 신당의 핵심 가치와 시스템과 문화로 보면 신당은 (한국 정치 지형으로 보면) 거대한 궁궐이 생길 자리에 세 칸짜리 오두막을 짓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이야 어차피 한 칸도 안 되는 오두막이지만 문제는 이대로 가면 미래에도 세 칸 오두막을 넘어서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자칫하면 신당은 큰 강을 만들 수 있을 정도의 엄청난 지하수를 뽑아 올리는 마중 물이 되기는커녕, 분출하려는 지하수를 틀어막는 역할을 할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민주당 등 경쟁 정당에 대한 고마운 예방 주사로 기능할 수가 있다. 한국 정치가 발전하려면 민주당을 사경을 헤맬 정도로 타격을 주어야 하는데 말이다.

 

물론 신당이 세 칸짜리 오두막으로 설계된 것은 도덕성과 전문성(국가경영 능력)을 겸비한, 새로운 정치를 구현할 잠재력을 가진 사람들이 거의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냥 손가락질만 할 수가 없다. 물론 이는 신당 추진 세력이 중시하는 가치와 창당 방식의 후진성에 더 큰 책임이 있다.

 

국민이 주인인가? 당원이 주인인가?

국민참여정당 창당제안모임(handypia.org)의 대표 상품이자 최고 핵심가치는 국민참여이다. “누구나 쉽게 (신당에)참여할 수 있고 누구나 당에 발언할 수 있고 당원이 중요한 결정에 직접 참여하는 것”이다. 신당에 대한 가상 ‘10문 10답’의 첫 번째 질문이 “다른 정당과의 근본적인 차이를 한마디로 말하면 무엇인가?”인데, 그 답이 “국민이 주인인 정당”이라는 것이다.

 

“기존의 정당은 국민이 참여하기 어렵고 의견은 묻지 않고 동원의 대상으로 취급하고 정치지도자들의 권력게임이 중심인 정당입니다. 우리가 제안 하는 정당은 누구나 쉽게 참여할 수 있고 누구나 당에 발언할 수 있고 당원이 중요한 결정에 직접 참여하는 정당입니다. 근본이 다른 정당입니다.”(10문 10답)

 

이런 문제의식은 도메인(handypia.org)에도 반영되어 있다. 도메인에 압축된 메시지를 풀면 누구나 하나씩 갖고 있는 ‘핸드폰으로 쉽게 참여해서 만들어 나가는 좋은 세상’ 일 것이다.

 

그런데 한가지 이상한 것이 있다. ‘국민이 주인인 정당’이라는 구호이다. 낯선 듯, 낯익은 듯한 이 구호는 일반적으로 ‘국민을 주인으로 섬긴다’거나 ‘국민의 뜻을 잘 반영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어 왔다. 그런데 신당에서는 ‘국민의 정당 참여, 발언, 직접 결정을 용이하게 한다’는 의미로 사용한다. 즉 국민과 정당 사이에 있는 문턱도 낮추고, 당원과 지도부 사이에 있는 문턱도 낮췄다는 의미로 사용한다. (그런데 결론만 먼저 말하면 이 문턱은 결코 낮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높아질 가능성도 있다.)

 

어쨌든 ‘국민이 주인이다’는 말을 ‘국민을 주인으로 섬기고, 국민의 뜻을 잘 헤아린다’는 의미로 사용할 때는 정당과 국민의 관계는 기업과 고객의 관계처럼 분리되어 있다. 그런데 신당이 ‘국민이 주인이다’는 말을 할 때는 국민과 정당이 뚜렷하게 분리되어 있지 않다. 구분을 거부하려는 뉘앙스가 강하다. “누구나 쉽게 참여할 수 있고 누구나 당에 발언할 수 있고 당원이 중요한 결정에 직접 참여”하는 것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언뜻 보면 국민과 당원이 분리 되어, 국민을 대상화하는 전자가 국민과 당원의 일체형(?)을 지향하는 신당 보다 국민의 뜻을 잘 받들지 못할 것처럼 보인다. 과연 그럴까? 결론부터 먼저 말하면 실제는 정 반대다. 국민을 주인(왕)으로 모시고, 당원을 주인(왕)의 이해와 요구를 실현하는 일개 도구 내지 종으로 생각해야 위력적인 정당이 되고 나아가 집권을 넘볼 수 있다. 충직하고 유능한 종은 주인(왕)을 감동시키기 위해 골머리를 싸매고 연구한다. 마치 기업이 고객을 감동시키기 위해 시장(소비자/경쟁자)을 조사하고, 기술을 개발을 하고, 서비스 품질을 혁신하고, 조직과 리더십을 혁신하는 것처럼…… 실제 비즈니스의 상식은 돈을 쫓으면 돈이 달아나고, 고객의 마음을 쫓으면 돈이 절로 굴러온다는 것이다. 정치라고 다를까? 권력을 쫓으면 권력이 달아나고 국민의 마음, 즉 시대정신을 충직하게 쫓으면 권력이 굴러오는 법이다. 이는 바보 노무현이 증명한 것이다.

 

당원은 특별한 사람만이 될 수 밖에 없다.

정당의 사전적 정의는 “정치적 견해를 같이 하는 사람들이 정권 획득을 위해 자발적으로 조직한 집단”이다. 정치적 견해는 철학, 가치, 비전, 정책의 총체(이념)를 말한다. 당연히 정치적 견해는 천차만별이다. 좌파도 있고, 우파도 있다. 온건파(유연파)도 있고 강경파(원칙파)도 있다. 정치적 견해가 뚜렷한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정치적 견해가 뚜렷하고, 이를 대변하는 정당이 있다 할지라도 직업/직장 생활에 여념이 없는 사람이 당원이 되는 것은 또 별개의 문제이다. 아무리 정당의 문턱을 낮추어도 정당에는 참여하지 않고 얼마든지 지지, 성원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용케 정당에 참여하여 정해진 의무를 이행했다 할지라도 권리(발언, 중요 결정 참여)를 행사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사리 분별력이 있는 사람은 사안에 따라서 느낀 대로 발언하고 행동해도 되는 일도 있지만, 조사.연구 없이 발언하고 행동해서는 안 되는 일도 많다는 것을 안다. 요컨대 발언권과 결정권이 주어졌다 하더라도 이를 함부로 행사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실제 정당이 받아 안아 연구하고, 결정할 사안은 생업에 바쁜 사람들이 관여하기에는 너무 복잡미묘한 사안이 많다. 전당원 토론과 투표에 많은 것을 내릴래야 내릴 수가 없다는 얘기다. 이는 오롯이 최고지도부의 결정에 맡겨질 수 밖에 없고, 맡겨져야 한다.

 

이처럼 뻔한 얘기를 길게 한 것은 신당이 정당의 문턱을 아무리 낮추고, 또 인터넷과 핸드폰을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활용한다 할지라도, 구조적으로 소정의 권리와 의무를 이행하는 당원들은 지극히 한정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국민참여정당은 제안문의 조직노선대로 가면 결국 소정의 권리와 의무를 이행한 특별한 (기간)당원들의 당이 될 수 밖에 없다. 물론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국민참여정당을 표방하고 실제로는 기간당원들의 당이라고 해도 그 누구도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다. 중요한 것은 국민의 이해와 요구를 실현하는 도구적 유용성이 있느냐 없느냐이다.

 

국민의 입장에서는 민심을 잘 반영하여 국민의 이해와 요구를 잘 실현하기만 하면, 당의 주인이 누구건 상관이 없다. 김대중 같은 카리스마 넘치는 1인 보스가 주인이건, 소수의 정치인의 과두지배체제건, 기간당원이 주인이건, 몇 개의 지방정치조직의 지도자들이 주인이건 국민을 주인으로 잘 알아 모시는 충직한 종이 되면 그 당은 성공하게 되어 있다. 

 

단적으로 김대중은 1노 3김과 함께 1인 보스 정치의 대명사였다. 김대중이 총재로 있던 당을 사람들은 1인 사당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얼마나 격렬하게 비난했던가!! 그러나 지나고 보니 김대중당은 민주, 자유, 화해, 평화, 균형발전, 풍요를 갈구하는 국민들의 충직한 종으로서 비교적 잘 기능하였다. 반면에 열린우리당은 김대중당 보다 훨씬 민주적인 정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도구로서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끝내 해체, 소멸되었다. 정당은 어차피 일반 국민들과는 다른 특별한 소수가 하는 정치조직인 이상 당내 민주주의가 도구적 유용성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국가의 운영 원리인 민주공화제는 국민에게 밥도 먹여주고, 자유도 준다. 하지만 기업이나 정당은 다르다. 운영원리나 조직형태는 상황(정세, 업종, 시장)이나 리더십이나 구성원(종업원, 당원)의 준비 정도 등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취할 수 있고, 취해야 한다. 기업으로 치면 종업원 지주제가 강력한 경쟁력을 담보할 수도 있고, 독재적이지만 탁월한 CEO가 강력한 경쟁력을 담보할 수도 있다.
당 지도부를 비롯하여 특별한 소수-이들이 수만 명의 기간 당원이라면 금상첨화다-가 국민을 주인으로 섬기기 위해 오랫동안 김대중, 노무현만큼 치열하게 나라를 연구하고 진정성 있게 실천해 왔다면, 이들의 경험, 지식, 지혜, 열정을 모아내는 시스템(당내 민주주의)은 엄청난 성공을 보장할 것이다. 하지만 당의 리더십과 기간당원과 시스템과 문화가 김대중, 노무현의 정신, 방법과 멀다면 당내 민주주의와 웹2.0 기술을 아무리 도입해도 결코 성공 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신당이 진지하게 자문해 보아야 할 것은 자신들이 국민의 이해와 요구를 실현하는 도구(종) 역할을 얼마나 충실하게 수행해 왔고 수행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왜 김대중이 그렇게 칭송 받는가? 그는 청년 시절부터 정말로 열심히 공부했다. 다방면의 전문가들과 소통했다. 1950년대 김대중이 쓴 글, 1960년대 연설문을 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박현채의 힘을 많이 빌렸다 하더라도 ‘대중경제론’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과거나 지금이나 대부분의 정치인들이 정치공학에 엄청난 에너지를 쏟을 때, 김대중은 자신의 에너지의 상당부분을 세계와 나라를 연구하는데 썼기 때문에 군계일학적인 존재가 된 것이다. 반면에 정치(전술)감각은 김대중 보다 한 수 위로 평가되는 김영삼은 왜 낮게 평가되는가? 건강은 빌릴 수 없어도 머리는 빌릴 수 있다는 신념 때문 아닌가?

 

대역죄?

국민과 당원의 일체형(?)을 지향하면, 자기도 모르게 당원이 국민의 자리에 와 버린다. 이는 참여(민주주의)를 무슨 도깨비 방망이처럼 여기는 사고방식을 동반한다. 웹2.0은 더 더욱 참여를 도깨비방망이처럼 여기도록 만들고 있다. 이렇게 되면 국민의 처지, 요구, 불만, 고통 등을 헤아리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할 이유가 많이 줄어든다. 단적으로 신당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이력을 보면, 민주화 투쟁(열린우리당내 민주화 투쟁 포함) 경력은 괜찮지만, 21세기 들어 국민이 당하는 고통, 불만을 해결하기 위해 특정 분야를 깊이 연구를 하거나 국민이 가려워하는 곳을 긁어주기 위한 몸부림(시민운동 등)을 친 흔적은 그리 뚜렷하지 않다. 그러면 21세기의 김영삼이 되는 것이다.

 

신당의 정수인 창당 제안문에는 ‘국민과 당 사이의 문턱을 낮춘다’는 얘기를 비롯한 조직노선(원리)에 대한 얘기는 많아도, 정치노선에 대한 얘기는 신기할 정도로 적다. 정치노선은 국민들의 요구, 불만, 고통에 대한 응답이자, 국가 개조의 비전, 전략이다. 신당은 제안문에서 “환경 보호와 녹색의 가치를 전면에 내세우며……사회투자와 복지를 확대할 것”이며 “김대중, 노무현 민주정부 10년의 성과를 계승하고 한계를 극복해 나갈 것”이라고 간략히 언급 하였다. “보다 구체적인 정책과 노선은 국민과 함께 만들어 가겠으며, 국민의 집단지성을 자산으로 삼아 정책을 개발하고 발전시켜갈 것”이라고도 밝히고 있다.

 

조직 노선(그것도 당 운영시스템에 국한되어 있다)에 비해 정치노선이 왜소한 것은 참여와 민주주의(국민과 당과 지도부의 생각의 일체화)와 웹2.0과 집단지성에 대한 과신 내지 착각을 빼놓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이런 생각이 좀 더 나가면 민주주의를 잘 작동시켜 국민과 당원의 일체화(?)를 실현하면 당원들의 뜻이 곧 국민의 뜻이라고 간주하게 된다. 이는 국민이라는 주인의 자리에 종에 불과한 정당을 올려놓는 대역죄를 범하는 것이다. 대역죄의 후과는 북한이 잘 보여주고 있다. 북한은 완벽한 민주주의(수령, 당, 인민의 완벽한 소통)을 전제로 당과 수령의 뜻이 곧 인민의 뜻이라고 강변한다. 당과 수령은 인민의 경험, 지식, 지혜, 양심을 총화 했기에 한계는 있을지언정 오류는 없다고 강변한다. 신당에는 반면교사이다. 그리고 집단지성을 통한 정책 수립의 가능성과 한계는 민주주의 2.0, 진보주의 연구 카페, 서프라이즈 등 토론이 활발한 웹싸이트의 경험과 성과를 곱씹어 보면 좋을 것 같다.

 

역지사지로 생각하다

시민운동단체, 정치인 팬클럽, 연구소를 후원하는 사람들은 돈 낸 만큼 권능을 행사하려는 사람이 아니다. 그 가치와 비전에 공감해서 그냥 내는 것이다.   나는 정치조직이든 시민단체든 기본적으로 가치, 비전이 확고한 중심을 차지하고, 거기에 사람들이 공감하도록 하는 것이 기본 중의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국민참여, 국민주인, 당원주인을 강조하는 신당은 소정의 의무를 다하면 당의 지분(1/N) - 결정권과 발언권-을 준다는 것을 강조한다. 물론 여기에 공감하는 ‘정치 매니아’층도 좀 있겠지만, 결코 많을 수가 없다. 입장 바꿔 생각해도 국민의 충직한 종 노릇을 잘 할 것 같은 정치인과 당에 돈을 내고 싶지, 가치, 비전은 모호하면서 나에게 결정권과 발언권을 준다는 당에는 돈을 내고 싶지 않다. 

 

그리고 신당에는 생활 정치에 대해 착각하는 사람도 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내가 아는 한 생활정치는 생활을 하면서 인터넷, 휴대폰 등을 이용하여 정당활동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다. 아니 부차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자기가 발을 디디고 있는 현장 개혁 운동, 다종 다기한 시민운동, 노동조합, 생협, 연구소, 블로그 등으로 국민들이 가려워하는 곳을 잘 긁어주어 사회적 신뢰를 쌓는 것이다. 또한 건실한 생활태도로 잘 아는 사람들로부터 지지와 신뢰를 받는 것이다. 한마디 하면 주변에서 먹어주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신당 홈페이지에서 엄청난 열정을 발휘하는 사람들은 이런 진짜 생활정치를 잘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물론 나는 진짜 생활정치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신당을 하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다. 낮아지고 봉사하고 그래서 다양한 성향의 사람들과 크게 함께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 불경, 중국고전과 수많은 사람들이 체득한 삶의 지혜는  낮아지면 높아지고, 버리면 얻고, 봉사하면 주인이 된다는 것이다. 

 

신당의 철학

정당을 묶는 끈은 강령이나 정책이 아니라 철학이다. 굵직한 사고방식 내지 아이디어라고 할 수 있다. 이 핵심은 주된 대립물을 무엇으로 설정하느냐 이다. 과거나 지금이나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 참여자 중에서 그 강령과 정책을 보는 사람은 별로 없어 보인다. (신당도 비슷하지 않을까 한다) 하지만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지지자들은 대체로 노-자간 대립 혹은 미.일(제국주의)-민족(신식민지)간 대립 관계가 모순의 기본축이라는 철학을 공유하고 있다. 이는 신자유주의를 주요 대립물로 보며, 노동자, 민중의 조직된 힘과 이들의 정치세력화가 한국 사회의 진보, 개혁의 관건이라는 사고방식으로 귀결된다. 물론 이들의 철학은 일조일석에 생긴 것이 아니다. 길게는 식민지 시기부터, 가깝게는 산업화의 그늘이 짙어지던 1970년대부터 수많은 투쟁을 통해서 형성된 것이다. 

 

나는 특정 정당의 당원들이 공유하는 철학이 이렇듯 긴 시간을 통해서 형성되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철학은 지도부와 초기 동력의 삶에 체화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철학에 입각해서 투쟁하고 좌절하고 또 절치부심하며 일어나 또 투쟁 해 본 역사가 있어야 한다.  나는 신당 참여자들에게도 이런 철학이 있다고 생각한다. 다수가 공감하는 굵직한 사고방식(공유가치)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바로 정당의 명칭, 도메인, 제안문, 10문10답집에 나타나 있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기간당원이 주인이 되는 정당에 대한 꿈’이다. 소수의 유력 정치인에게 휘둘리지 않겠다는 결의다. 수도권에 휘둘리지 않는 지방 분권형 정당에 대한 지방정치조직 지도자들의 꿈이다. 노무현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다. 또한 노무현을 내쫒고 부정하고, 열린우리당을 파괴한 민주당에 대한 불신과 회의다. 집단 지성에 대한 믿음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국가를 어떻게 개조해 보겠다는 비전과 대안은 약하고, 실천은 너무 짧다. 당연히 정치노선과 관련해서는 친노라는 정체성 아닌 정체성 외에는 찾기가 쉽지 않다. 물론 나는 친노라는 정체성이 소중한 자산이라고 생각한다. 노무현의 정신과 방법을 잘 계승, 발전시키기만 한다면......그런데 나는 신당을 하는 사람들이 노무현의 성과, 한계, 오류를 어떻게 정리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이것만 잘 정리해도-물론 체화와 실천이 뒷받침 되어야겠지만- 큰 울림이 있는 철학이 될 것 같은데......

 

친노정당? 국민참여정당?

솔직히 신당은 친노정당이어서, 아니면 유력한 대권주자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지지할 사람은 많아도 국민참여정당이어서, 혹은 지방분권형 정당이어서, 녹색복지국가 비전에 공감해서 지지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국민참여는 사실 기간당원의 권리를 크게 보장하는 것이라서 아는 사람만 아는 가치고, 녹색복지국가는 그것을 내걸고 오랫동안 뭔가 치열하게 실천한 것이 없어서 감동이 없어서다.

 

그런 점에서 나는 신당을 친노정당이라고 부르는 것은 결코 틀리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름대로 본질을 정확히 짚었다고 생각한다. 아니 너무 영광스럽고, 과분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노무현의 합리적 핵심은 참여가 아니라 국민을 주인으로 섬기는 충직한 종의 태도라고 생각한다. 시대정신을 온 몸과 마음을 바쳐 구현하려고 하는 태도라고 생각한다. 도덕성, 희생정신, 책임정신, 진정성, 새로운 진보의 길을 찾으려는 치열한 노력 등이 그 발로이다. 결과는 신통치 않았지만 민주주의 2.0을 만든 것도, 진보주의 연구 까페를 만든 것도 그 노력의 일환이다. 그런데 신당은 노무현 정신에서 솔직히 너무 멀어 보인다. 참여정부에서 어떤 직책을 맡았다는 것 외에 노무현의 정신이나 합리적 핵심을 어떻게 구현해 왔는지 알 수가 없다. 내가 과문해서인지 모르지만 여태까지 만들어낸 지적 성과물, 조직적 성과물, 실천적 성과물이 무엇이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신당의 주요 지도자가 신당이 ‘친노정당’임을 부인한 것은 더 광범위한 참여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대안으로 붙잡은 ‘국민참여정당’은 친노 보다 훨씬 협소한 가치이다.  그래서 차라리 ‘친노정당’이라고 자칭 하라는 것이 아니다. 시대정신을 구현하고, 또 자신들의 삶이 증거하는 가치, 비전을 내세워라는 것이다. 물론 이 말이 명칭과 구호만 살짝 바꾸면 신당은 성공한다는 말이 아님은 굳이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민주당은 이명박과 한나라당의 만행으로부터 자신의 존재 이유 내지 특장점을 넘치도록 찾는다. 마찬가지로 민노당, 진보신당, 민주당의 후진성과 졸렬한 행태로부터 신당의 존재 이유를 넘치도록 찾는 것이 어렵지 않다. 하지만 양당 구도를 뒤흔들수 있는 위력적인 정당으로 성장하려면 민주당에 비해 약간의 비교 우위(당원의 권리 강화 등)를 갖춘 정도로는 택도 없다. 국민의 요구, 불만, 고통에 반응하는 철학, 가치, 비전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기존 양당구도를 뒤흔들 크고 강력한 정당은 거대한 강과 같아서 이 골짜기 저골짜기에서 발원하는 수많은 지류가 모여들어야 한다. 나는 신당은 그런 거대한 강에 도달하는 지류가 되었으면 한다. 수량이 많고, 유속이 좋으면 그 강의 주류가 될 것이다. 수량과 유속은 국민적 지지와 성원이 결정할 수 밖에 없다. 단적으로 유력 정치인은 혼자지만 엄청난 수량을 갖고 있다. 그러나 가치나 시스템이나 리더십 측면에서 세 칸 오두막 구조를 고치지 않는 한 신당은 자칫하면 강에 도달하지 못하고 증발해 버릴 수도 있고, 엉뚱한 곳으로 흘러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사회디자인연구소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나는 국민을 주인으로 잘 섬겨서 노무현, 김대중처럼 이쁨을 받는 사람이나 세력이 있다면 얼마든지 그들을 섬길 용의가 있다. 하지만 국민을 주인으로 섬길 준비를 각고의 노력으로 하지 않는 정당에는 참여할 생각이 없다.(계속)

 

사족 하나, 사회디자인연구소는 그 동안 진보의 혁신을 위한 철학, 가치, 비전, 주요 정책들을 생산햇다. 통계 중시, 실사구시 중시, 사상이념의 토착화 등을 부르짖었다. 당연히 이는 사람들에게 감동과 기대를 주는데 한계가 있다. 그래서 앞으로는 공간/공공 디자인과 일자리/산업관련 정책 디자인 컨텐츠를 강화하기로 하였다. 2010 지자체 선거와 2012년 대회전에 쓸 무기도 마련하고, 진보가 국가경영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그래서 이런 정치평론글, 그것도 비판 글은 가급적 안쓰기로 하였으나 피할 수 없는 정치평론이라서 쓴다.

by 김대호 | 2009/09/02 21:18 | 정치와 통계 | 트랙백(1) | 핑백(1) | 덧글(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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