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론"과 "공평론" -홍기표 위원님의 글을 읽고-

권복규 교수님께서 이런 글을 보내왔더군요.

  

 "복지론"과 "공평론" -홍기표 위원님의 글을 읽고- 

                                              권복규(이화여대 의대 교수)  kivo@ewha.ac.kr</span>

 

작년 12월 프레시안에 실린 홍기표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정책위원님의 글은 제목이 참 섹시하다. “의사가 돈 잘 번다고 의과대학 없애야할까?”였다. 나는 복지를 잘 모르고, 정치는 더욱 모르지만, 의과대학에서 월급을 받는 사람으로서 이런 제목이 달린 글을 보면 뭔가 뭉클 하는 것이 느껴진다. 홍위원님은 소위 “공평론”을 “의사가 돈 잘 번다고 하니 의과대학을 없애자는 논리”쯤으로 치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의사가 여전히 기득권의 상징 집단 정도로 묘사되는 것도 아쉽지만, “공평론”(공정론이라고 해도 좋다)이 이런 식으로 매도되고 있다는 데에 대해서 더욱 우려를 표하며, 홍위원님의 글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먼저 역동적 복지국가론과 “공평론(일단 홍위원님이 이렇게 쓰셨으니 따르기로 한다)”이 중요도나 선후를 가릴 문제가 아니라는 지적에 대해서는 공감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사실 우리가 추구하는 복지국가란 당연히 정의와 공정이 함께 실현된 국가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공평론은 현재 복지국가소사이어티 등이 추구하고 있는 “역동적 복지국가”의 개념에 21세기 대한민국이라는 현실 국가의 문제점들이 상당히 누락되고 있다는 바로 그 점을 지적하고 있다. 복지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복지를 실현하여야 하는 주체들-국가, 공무원, 정치권 등등-이 상당히 큰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이다. 장하준 교수 등의 말처럼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는 현재 우리 사회에서 쏠려 있는 부를 끌어올려 열악한 계층의 국민들도 생존이 보장되게끔 기본적인 복지를 보장해주어야 한다는 데는 원칙적으로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좁지만 물이 많이 고여 있는 논에서, 넓지만 물이 부족한 논으로 물대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맞다. 그런데 그 양수기가 심각하게 고장이 났다면? 넓은 논에 물을 대라고 틀어놓았더니 엉뚱한 데 물을 쏟아 붓거나 양수기 모터가 수냉식이라서 자기 과열 방지에 그 물을 다 써버리게 된다면 먼저 양수기를 고치는 게 순서 아니겠는가? 
 

 현재 한국의 법률체계, 관료와 공무원 집단, 사회복지단체, 의료계, 교육계, 연금 및 사회보험, 공기업 , 시민의 의식구조 모두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으며, 세계에서 가장 빠른 고령화는 이 문제를 더욱 가혹하게 만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무조건적인 복지 주장은 만약 그것이 실현된다 해도 엄청난 비효율과 낭비, 그리고 일부 “복지족”들의 잔치로 끝날 가능성이 농후하다. “공평문제를 복지국가 이전에 선차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복지국가의 그 날은 언제 온단 말인가?”라는 홍위원님의 주장에 대해서는 “그런 문제들이 해결되지 못하면 제대로 된 복지국가의 그 날은 결코 올 수 없다”고 답할 수밖에 없다. 그것을 어떤 자연적인 시간순서대로-몇 년, 몇십 년, 몇백 년 뒤에-하자는 것도, 완벽한 공평사회를 만들고 난 뒤 복지국가를 해야 한다는 주장도 아니다.  “공평론”은 복지국가를 하기 위해서는 복지시스템의 확립과 더불어 당연히 우리가 경시하고 있는 이러한 하부구조들을 들여다보면서 함께 고쳐나가야 한다는 주장이다.

 

두 번째 “지대를 폐지하기 위해 땅을 없애버려야 하는가?”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은 “공평론”을 과도하게 단순화, 극단화하는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동일한 일을 할 때 적어도 유사한 수준의 임금을 받아야 한다는 원칙적 주장을 “대기업 노조를 깨버려야 하는 주장”으로 이해한다면 곤란하다. 이상적으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모두 정규직으로 해 주면 문제는 간단하겠지만 그것이 쉽지 않다는 것은 홍위원님 자신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사회는 도무지 Win-Win을 하기가 어려운데 사실 노동자 연대나 사회적 연대의 차원에서 대기업 노동자들이 조금이라도 양보하면서 사측에 비정규직 노동자의 처우를 개선하라고 압박하기가 그렇게 어려운 것일까? “사회적 공평성을 위해 모든 신의 직장 노동자들의 임금을 다 후려쳐서 평균임금 이하로 깎아야 할까?”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더 곤혹스럽다. 역시 지나친 극단화의 오류이고, 그 앞에 든 예는 의사와 변호사이다.

 

공평이라고 하는 개념은 “기계적 평등”이 아닌, 역동적 개념이다. 어느 사회나, 모두가 획득하기는 쉽지 않은 전문지식이나 특이한 기술이나 재주를 가진 사람들이 더 많은 수입을 올리는 것에 대해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용인한다. 하지만 동일한 일을 하면서, 임금의 차이가 크게 난다는 데 대해서는 거의 모두가 동의하기 어렵다. 게다가 전문지식이나 특이한 기술에 의존한 임금의 차이 역시 사람들이 생각하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의사나 변호사는 종사하는 노동의 전문성과 특수성, 그 직을 하기까지 투자한 시간과 노력, 업무가 갖는 사회적인 가치 등으로 보아 조금 더 받는 것을 부정할 사람들은 많지 않다. 홍위원님 자신도-대단히 못마땅하게 생각하면서도-그 “지대”에 대해서는 동의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것이 통상 임금의 열 배, 스무 배, 백 배가 된다면 대다수가 부당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즉 검사로 퇴임한 지 일주일 만에 월급을 1억원씩 받는다면 그건 당연히 불공평한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며, 그렇게 주는 데는 그 이전 직위에 대한 업무연관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것이며, 따라서 그런 일이 불가능한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 “공평론”의 주장이다.

 

그것을 모든 사람의 임금을 싹 깎아 평균임금 수준으로 만들자는 극단적인 주장으로 격하-또는 극좌적 입장으로 폄하-시키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지대를 다 폐지하자는 것이 아니라, 부당한 지대, 불공평한 지대를 없애자는 것이다. 대기업 노조를 없애자는 것이 아니라, 대기업 노조가 오로지 자신들의 협애한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지만 말고, 사회적 연대와 전체 노동자 계층의 연대라는 대의를 위해 움직일 수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 공평론의 주장이다.

 

세 번째, 시장이냐 국가냐의 단순한 이분법이다. 홍위원님이 볼 때 공평론은 시장의 실패를 시장의 개입을 통해 바로잡자는 괴상한 주장이다. 시장의 실패는 국가와 시민사회의 공적 개입을 통해서만 바로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공평론이 과연 그러한지는 차치하더라도 내가 볼 때 “복지국가론자”들은 현존하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시스템을 지나치게 신뢰하며, “국가”라는 현상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복지국가의 뿌리는 깊다. 조선왕조 자체, 아니 그 이전부터도 우리 국가는 일종의 복지국가를 표방했다. 국민들에게 글을 가르쳐주고(훈민정음은 왜 만들었나?), 의료제도로 혜민서와 향약을 운영하고, 진대법과 환곡제도를 시행하고, 흉년이라도 들면 왕부터 근신하고 반찬을 줄였다. 문제는 이 국가라는 시스템이 언제나 지배엘리트들에게 악용당하여 이 모든 제도들이 결국은 그들의 배만 불리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고부 농민항쟁은 왜 일어났는가? 지역 농민들을 위해 보를 쌓는다고 하고는 관료가 그 이익을 독점했기 때문이 아닌가? 3정의 문란 때문이 아니었는가? 현재 우리도 많은 복지제도-4대연금, 국민건강보험, 의료보호, 기초생활보장제도 등-와 국가가 지배하는 공교육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지만, 위에서 보는 것과 현장에서 보는 것은 커다란 차이가 있다. 공평론이 주장하고, 많은 소박한 국민들이 공감하는 바는, 현재의 국가시스템에 맡겨서는 될 일도 안 된다는 것이다. 물을 퍼서 고루 나눠주라 했더니 대부분의 물이 그 시스템을 운영하는 데 가버리더라는 말이다.

 

복지국가론자들이 선망하는 북유럽의 복지국가들은 국가의 규모가 작고, 사회시스템과 의식구조 자체가 우리와 다르다. 척박한 자연환경 속에서 생존을 위해 단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그렇게 만들었고, 또 정직과 청빈을 중시하는 개신교 전통의 힘도 무시할 수 없다. 시장의 힘이 크고, 국가의 힘은 약해보이는 미국과 같은 나라에서는 시장과 국가 사이에 수많은 고리들과 매개체들이 있다. 종교(교회)와 지역공동체(community)등이 그것이다. 사실 서유럽과 미국의 역사를 통해 볼 때 복지는 대부분 교회와 지역공동체의 몫이었고, 국가가 상당 부분을 가져간 이후에도 여전히 힘을 발휘한다. 우리도 덜떨어진 국가에 대해 기존의 촌락공동체와 대가족(가문, 종친)제도가 일부 완충 역할을 하였지만, 전통 농경사회와 함께 그것이 붕괴한 후에는 대부분 알몸으로 황량한 경쟁사회에 내던져진 것이다. 그런데 그 자리를 관료-공무원 및 준공무원-정치인-법조엘리트들이 자기 이익 앞에서는 똘똘 뭉치는 레비아탄인 “대한민국”으로 메꾸겠다는 것인가?

 

우리나라의 지식인 엘리트와 정치인들은 “국가”를 과도하게 신뢰하는 경향이 있다. 실제 바닥에서 “국가”를 상대하는 “민초”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말이다. 말이 길어지지만, 국민건강보험 실시 이전에 70년대 초반 우리나라에는 “청십자 의료운동”이라는 게 있었다. 고 장기려 박사가 창시했고, 뜻을 같이하는 의료인들과 활동가, 시민들이 참여했던 자생적인 의료공제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박정희에 의해 압박을 받고, 관이 주도하는 의료보험으로 새 판이 짜졌다.(물론 북한에 대한 체제경쟁의식이 한 몫 했다). 그 결과는 모두가 아는 바다. 매년 1조원이 넘는 건강보험 적자와, 모든 의료인들의 불만, 여전히 65%에 불과한 의료 급여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이다. 그런데도 복지국가론자들은 관이 주도하는 더 큰 판(건강보험 하나로)을 짜야 한다고 주장한다. 시민들의 자생력과 상상력, 상호 협조와 공동의 노력을 어떻게 조성하고 돕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이 모든 것을 국가, 국가, 국가에만 의존하려 한다. 이는 박정희와 무엇이 다른가?

 

시장-국가의 양분법은 지극히 위험하고 단순한 인식이다. 사람들이 사는 사회에는 시장도 아니고 국가도 아닌 다양한 층위의 그룹들이 존재한다. 노조도 그중의 한 집단일 것이다. 교회나 사찰, 시민단체도 교육과 복지 기능을 수행할 수 있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국가의 역할은 그런 것들을 더 잘 하고, 투명하게 하도록 돕는 것이지, 모든 기능을 다 끌어와 독점하는 것이 아니다. 백번 양보하여, 그렇게 할 수 있다 하여도 지금의 대한민국으로는 안 된다. 사전에 철저하게 수선하고 철저히 감시하지 않으면 복지 재정이란 엉뚱한 인간들의 배만 불리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신자유주의에 대한 생각이다. 언제부터인지 한국사회의 모든 악은 “신자유주의”로 귀결되는 것처럼 보인다. 일부 견해가 다르다고 해서 모두 “신자유주의자”라고 낙인을 찍어버리는 것은 수구세력의 “빨갱이” 낙인찍기와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과연 한국 사회의 모든 문제가 신자유주의로 귀결되는가? 대부분이 90세 이상 살게 되는 고령화도 신자유주의의 산물인가? 기후변화와 지구온난화도 신자유주의의 산물인가? 세계화와 그로 인한 노동력과 자본의 이동도 오로지 신자유주의의 산물인가? 이명박은 신자유주의자인가? 뉴라이트는 신자유주의자인가? 복지국가를 표방한다고 하는 박근혜는 신자유주의자인가? 경제이론으로서의 신자유주의가 문제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논하기에는 국가와 제도의 보호 아래 공정한 경쟁 자체가 불가한 대한민국의 현실이 더 문제라는 것이다. 즉 한번 임용고시에 합격하면 평생 교사직이 보장되고, 한번 고시에 붙으면 평생 변호사 일을 할 수 있고, 한번 대기업에 입사하면 (노조가 강한 직장의 경우) 퇴사 때까지 일자리가 보장되고, 공무원이나 공기업 임직원은 더 말할 것도 없고, 한번 교수가 되면 연구를 어떻게 하든 간에 정년이 보장되는 한 편에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나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국가와 사법제도에 의해 보장을 받는 전자와 그렇지 못한 후자와의 사이에 격차가, 엔간한 복지 재정으로 감당하기에도 너무나 커 버렸다는 것이다. 물론 교사, 의사, 변호사, 교수와 같은 전문직들은 사정이 좀 다르겠으나, 이들 역시 선진국에서는 평생 교육과 평가의 대상이고 적절한 능력을 유지하지 못하면 현업에 종사하기가 어려운 것은 우리도 따라가야 할 방향이 아니겠는가. 한국 사회의 수준에 비해, 그리고 자신들의 역량에 비해 과도한 특혜를 누리는 기득권 집단들을 향하여 정의와 공평을 외치는 목소리까지 “신자유주의”라 비난한다면 그 신자유주의는 과연 어떤 신자유주의란 말인가?

 
내가 느끼기에 복지국가론의 이면에는 여전히 80년대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있다. “자본”과 “시장”을 증오하고, “국가”와 “정치”를 과도하게 신뢰하며, 정권만 잡으면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는 단순한 사고가 그것이다. 그러나 과연 “복지론”가지고 게임이 될까? 아마 복지국가의 가장 큰 수혜층이 될 고령층은 진보개혁복지보다는 70년대의 향수어린 “박근혜식 복지”를 찍을 것이다. 복지국가를 떠메고 나가 실제 재정을 부담해야 할 중장년층은 증세와 건강보험료 인상을 결코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기득권 집단들이 온존한다면 거기에 끼기 위한 살인적인 경쟁을 감수해야 하는 청년층은, 실업수당 등으로 약간 따스한 기운을 느끼더라도, 피부에 와 닿는 감동을 결코 느끼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복지론자들이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지 않고, 보고 싶지 않은 부분도 보기를 간절히 원한다. 대한민국의 현실, 미래, 그리고 무엇보다 젊은이들의 생각에 귀를 기울이기를 바란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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