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486과 진보와 대한민국의 총체적 혼미다 책 비평

문제는 486과 진보와 대한민국의 총체적 혼미다
-<진보집권 플랜>과 ‘조국 현상’을 연찬한다(최종)-

조국 비판에 따른 부담

내가 조국 교수에 대한 진보 진영의 이상 환호와 기대에 대한 비판적인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을 때만하더라도, A4 2매로 압축한 ‘창비서평’을 약간 보완해서 많아도 A4 7~8매 정도면 연찬이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조국 현상의 뿌리와 열기를 살펴보면서 글이 점점 길어졌다. 그 동안 손학규, 정동영, 진중권, 김호기 등에 대한 실명 비판 글이나 연찬 글을 몇 개 써봤는데, 이번 글처럼 부담이 많이 가는 글은 없었다.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해 봤다.

첫째, 조국 교수는 유명 정치인과 달리 아직까지는 정치적 반감을 살만한 뚜렷한 정치 행위를 하지 않아 "Anti"가 별로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진중권이나 나처럼 남에게 상처 주는 날카로운 정치적 발언을 한 적도 별로 없다. 물론 앞으로 정치 현안에 대해 발언(가설 정당 등)을 적극적으로 하면 달라지겠지만.......

둘째, 사랑에 굶주린 사람이 어쩌다 발견한 “내 사랑-비록 짝사랑일지라도-”에게 확 쏠리듯이, (진보집권) 희망에 굶주린 사람들이 그럴듯한 진보 스타(정치인?)에게 확 쏠리는 심리 때문이다. 이는 본질적으로 2007년 문국현 현상의 재판이자 “희망 결핍 증후”로서, 모처럼 발견한 실낱같은 희망에 대해 “냉정하게 따지는 것”을 거부한다. 희망은 있어서 가지는 것이 아니라, 팍팍한 삶이 요구하기 때문에 (환상을 만들어서라도) 가지는 것이다.

셋째, 진보 동네 전체에 흐르는 ‘성찰 회피, 논쟁 회피, 묻지 마 연대’ 분위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엇이 진보인지, 무엇이 진짜 진보집권의 길인지는 묻지 않고, 오로지 연대, 연합, 명망 활용의 정치공학만 난무하는 세태에서 노선과 정책을 시시비비하는 것은 여간 부담스럽지 않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묻지 마 연대’는 아니다. 민주당 좌클릭과 복지국가를, 더 이상의 논쟁이 필요 없는 자명한 진리로 삼아, 진보 단일정당의 대전제로 삼자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내가 볼 때 <진보집권 플랜>의 수많은 주장과 조국, 오연호의 떠들썩한 정치 행위는 진보집권과 역사의 전진을 위태롭게 하는 일종의 편향이자 폭력이다. 하지만 그렇게 느끼는 사람이 별로 없다면 내 비판 행위가 오히려 시기, 질투심에 사로잡힌 자의 폭력(흠집 내기)으로 비칠 것이다.

넷째, 한국 진보 진영의 힘 있는 대중 단체와 매체들이 조국 교수를 띄워주고, 떠받들며, 유력 정치인들도 (그 노선에는 결코 동의하지 않아도) 조국 같은 인기인과는 여하튼 잘 지내보려 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내 비판은 이들의 정치적, 지적 권위를 깎아 내리기에 거북하게 느껴질 것이다. 오마이뉴스는 접어두고라도, 조국 교수의 지적 권위와 대중적 명망을 높이 사서 이를 활용하려는 힘 있는 단체들이 한 둘이 아니다. 그를 진보 부흥의 전도사라고 칭하고 여러 번의 강연 요청을 하는 전교조(물론 그의 친구인 전교조 핵심 간부가 했다는 소리지만), 기관지 ‘노동과 세계’를 통하여 그를 띄워준 민주노총, 그가 주요 멤버로 참가한, 한국판 무브온을 지향한다는 ‘내가 꿈꾸는 나라’ 운동-여기에는 한국을 대표하는 시민사회단체 간부들이 즐비하다- 그 외에도 전국 곳곳의 수많은 모임(단체)에서 그의 강연을 열렬히 요청한다고 한다. 민주당도 이번 재보선에서 조국 교수에게 분당을 출마(공천)를 타진 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게다가 지금 공공연한 ‘조국 Anti’는 극히 치졸한 논리로 흠집 내기를 일삼는 동아일보 같은 보수 언론뿐이다. 그래서인지 조국 비판 행위가 자칫 ‘국가보안법’의 심리와 논리를 그대로 빼박은 ‘진보 보안법’ 위반 혐의(이적 행위)까지 덮어쓸지도 모르겠다는 두려움도 생긴다. 조국 교수에 대해 말도 안 되는 비판을 늘어놓았다가는 진보언론 권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수만 명일지 수십만 명 일지도 모르는 열성 팬들에 의해 정치적으로 매장 당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섯째, 진보의 정치/정책 노선을 직업적으로 고민하는 사람으로서 전문가적 책임의식이 발동했기 때문이다. 사실 진보의 이념, 정책, 문화, 리더십 등의 혁신을 중시하지 않는 정치인들은, 대체로 대중적 인기가 있는 사람을 어떻게든 활용하려고 할 뿐, 그와 불편한 관계를 가지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 같은 사람은 달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국 교수는 한 개인이 아니라, 민주당 좌클릭과 진보좌파당 우클릭과 약간의 정치공학(통합이나 연합)으로 진보 집권이 가능하다고 믿는, 생각이 짧은 수십 수백만 진보 지지층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여섯째, 어쩌면 이것이 결정적일지도 모르겠는데, 글 쓰는 사람이 자기도 모르게 몸에 밴 지나친 신랄함 때문이다. 사실 나는 조국 교수와 길게 등을 질 관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강호의 실력 있는 선수들과 더불어 진짜 진보 연속집권 플랜을 설계하는 일을 하게 되지 않을까 한다. 하지만 진보를 집권에서 멀어지게 하는 이념, 정책적 혼미와 부박한 문화 현상에는 단호하게 일격을 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모순적인 요구들이 교차하니 글이 길어지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범진보 동반몰락의 원인

대중적 영향력이 큰 정책 제언자로서 조국 교수의 핵심 노선을 연찬해 보자. 이는 2006~8년의 범진보 동반몰락에 대한 진단과 20011~12년의 대안이다.

조국 교수는 노무현 대통령의 대연정 제안을 2007년 대선 패배의 큰 요인으로 지적한다.
“한나라당에게 대연정을 제안하는 바로 그 순간, 2007년 대선의 패배는 예고된 겁니다. 진보 개혁적 유권자 입장에서 보면 탄핵후 완전히 몰아줬는데 제대로 마무리를 못한 채 한나라당하고 연합하려 했으니까...실망하여 이명박에게 표를 던져 버린 것 아닙니까?“(p 141)

그리고 한나라당의 뉴타운 (사기)공약을 한나라당의 2008년 서울의 총선 승리의 결정적인 요인으로 지적한다.

“한나라당은 뉴타운 공약으로 강북에 사는 중산층 이하 서민의 욕망에 불을 질러”(p 131)“보수진영 입장에서 보면 뉴타운 공약은 잘 짠 전략......한방에 강북 전체를 먹어”(p 132)

2008년 총선에서 시원치 않은 성적을 올린 민주당이 한나라당의 승리를 폄하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진보의 비전과 정책을 고민하는 사람들은 냉철해야 한다. 2008년 총선은 그 5개월 전 대선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뉴타운 공약이 영향을 미쳤지만, 그것이 서울의 선거 판세를 근본적으로 바꾸었다는 것은 서울시민을 너무 우습게 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 범진보의 위기의 핵심이자, 진보집권 플랜에 대한 핵심 비판지점은 2006~8년의 극적인 민심이반의 원인을 아직도 해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인지도 모른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권에 대해 국민들과 지지자들이 등을 돌리는 핵심 이유는 그들의 기대와 요구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국민들과 지지자들을 실망시켰기 때문이다. 그런데 국민들과 지지자들의 요구와 기대는 원래 다양하고, 모순적이고, 때론 변화무쌍하기조차 하여 제대로 읽어내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 정말 그 핵심-이를 시대정신이라 명명한다-을 잡아내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런데 정치인들은 대체로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경향이 있다. 정치 현상을 해석할 때도 대중에게 자신의 생각과 정서를 과도하게 이입시켜 아전인수식 해석을 일삼는다. ‘참여정부가 확실히 좌클릭하지 못해서 국민들이 대거 한나라당을 찍었다’는 논리가 전형적이다. 대연정 제안이나 뉴타운 공약에서 지난 총선과 대선의 참패 원인을 찾는 조국 교수도 ‘아전인수’식 해석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환경과 시스템의 대충돌

참여정부의 좌절과 2006~8년의 민심이반, 그 이후 이명박 정권과 범보수에 대한 민심이반의 원인은 한국 정치와 지식사회가 반드시 해명해야 할 너무나 중요한 과제이다. 이것이 짧은 글로 될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꽤 오랫동안 숙성시킨 가설 하나 제시한다.

1990년대 초중반 이후 한국 사회는 세계화, 지식정보화, 탈냉전, 중국의 비상, 민주화 등으로 대표되는 급변한 국내외 환경(변화시키기 힘든 요소)과 한 때 빛나는 성공신화를 안겨주었지만 그 유효성이 다한 철학・가치・법・제도・문화・리더십(변화시키기 쉬운 요소)의 대충돌이 일어나고 있다. 이 대충돌은 역사적 전환기의 전형적인 증후인데, 이를 조정하는 공공리더십(정치, 행정, 사법, 지식사회 등)이 유능하면 심한 몸살 정도로 이 전환기를 넘길 수 있다. 하지만 공공리더십이 둔감・무능하고, 더 나아가 사익편향적이면 공동체는 극심한 대립, 갈등, 퇴행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외환위기, 노인자살 대란, 사교육/고시/공시/유학 열풍, 극심한 일자리・민생 위기, 경제사회적 활력・통합 위기, 2006~8년의 범진보의 동반몰락, 촛불 시위 사태, 급격한 민심의 재반전 등의 뿌리는 결국 역사적 전환기의 대충돌을 조정해 내지 못하는 공공리더십에 있다고 생각한다.

외환위기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

6.25 이후 최대의 국란으로 평가되는 1997년 외환위기의 원인을 뜯어보면, 이 시대 한국 사회가 앓고 있는 극심한 몸살 아니 중병이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있다. 외환위기는 한마디로 빛나는 성공신화를 낳은 동력과 방식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고집하다가 당한 禍이다. 즉 주객관적 조건(환경)이 크게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재미를 보던 가치, 정책, 제도를 고집해서 생긴 화이다.

외환위기의 원인으로 주요하게 거론되는 경기과열(1994년 8.8%, 95년 8.9%, 96년 7.2% 성장), 과잉중복투자, 경상수지 적자, 무분별한 종금사 허가와 방치 등은 그 자체가 성공신화이거나, 성공신화의 끝물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시의적절하게 적정 수준의 규제와 감독을 행사하는 것은 선진국의 일류 수준의 공공리더십이라 할지라도 결코 쉽지 않다. 그런데 1997년 외환위기는 선진국의 일류 수준의 공공리더십이라 할지라도 피하기 쉽지 않은 불가항력적인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삼류 정치,행정,지식사회의 오류라고 보아야 한다. 그것은 외환 위기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 1990년대 전세계적 외환 금융 자율화 상황에서 시장을 지나치게 무시한 금리・환율 정책이었기 때문이다. 당시는 외국과 한국의 금리차가 6~10%로 단기외화 차입을 통해 국내에서 원화대출을 하면 엄청 남는 장사였다. 당연히 저금리에 저평가된 외채를 빌려 국내에서 고리로 돈놀이를 하는 구도가 형성되었다. 김영삼 정부는 국민소득 1만 달러 업적에 집착하여 환율에 대한 정치적 개입을 통해 지나치게 높은 수준을 유지하였다. 적정=시장 환율이 달러당 1100원인 상황에서 800원을 고수한 것이다. 그래서 1997년 11월, 12월 환율 방어 위해 233억 달러를 소진하였다.(IMF환란이후 국제기구들의 한국에 대한 지원액 총액 220억 달러) 이는 과다한 외환차입을 한 기업과 금융기관의 요구이기도 하였다 여기에다가 금융감독의 실패(종금사 설립 허가와 자율화라는 미명하에 방치)와 금융통계(장단기 외채 만기 현황 등)의 미비도 한몫 하였다.

OECD 평균의 3배가 넘는 노인자살률

외환위기 뿐 아니라 우리가 겪고 있는 수많은 모순부조리, 대립, 갈등도 급변한 환경과 시스템(가치, 정책, 제도, 리더십)의 대충돌 문제를 공공이 제대로 조정하지 못한 것이 결정적이다. OECD평균의 3배가 넘는 노인자살률도 환경과 시스템의 충돌을 조정하지 못하여 일어난 비극의 하나이다. 한국은 도시화, 핵가족화, 평균수명의 증가가 급속히 일어났다. 농촌 공동체가 급격히 붕괴되고, 동시에 전통적인 대가족복지 시스템도 붕괴되었다. 하지만 정년은 꿈쩍하지 않았다. 그런데 공적 노후 소득보장 시스템(노령 연금)은 너무나 뒤늦게 만들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인 일자리나 소득에 대해서는 ‘희망근로’ 정도 외에 대안을 만들지 않았다. 노인을 위한 좋은 일자리를 많이 만들지는 못해도 노인들이 지하철에서 신문 주워서 팔게 하는 것보다는 더 나은 대안을 얼마든지 만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게다가 한국 사회의 과도하고 불합리한 격차(특권특혜, 배제차별) 구조로 인한 사교육, 과잉 고학력화, 유학 열풍 등으로 인해 청장년 자식세대의 부모 봉양은 구조적으로 취약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한편 기초생활보장 대상자에게는 관리편의주의로 인해, 아무도 빠져나오고 싶은 생각이 안 들도록 복지 폭탄(80여 가지가 넘는 복지혜택)을 투하 하다시피 하였다. 또한 청장년 세대가 낸 300조원이 넘는 연금을 쌓아놓고 그 고갈을 걱정하면서 해외 등지에서 투자처를 찾아서 고민하고 있다. 선진국의 대부분이 채택하고 있는, (한국 의료보험처럼) 필요한 만큼 걷어서 쓰는 연금 제도를 고민하지 않고 있다는 얘기다. 이대로 가면 몇 십 년 뒤에 지금 시대를 노인/부모 대량 학살의 시기이자, 저출산으로 인한 태아 말살의 시기로 기록되지 않을까 한다.

유럽적 연대성이 없는 곳에서 유럽의 강한 노동권

너무 격렬하고 살인적인 경쟁의 원인인 과도하고 불합리한 격차 구조도 한강의 기적을 연출한 재벌대기업 위주 성장 정책과 1987년 이후 단위 사업장내에서 수익성과 교섭력이 허용하면 신의 직장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투쟁한 노동운동의 합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거칠게 보면 한국의 핵심적인 모순부조리는 유럽적 연대성(산별노조, 동일노동 동일임금, 계급간 타협, 큰 공공부문, 세금을 통한 재분배 시스템 등)이 없는 환경에서 유럽 특유의 강한 노동권을 그것도 단위사업장에서 추구하고, 보험료를 내지 않으면 혜택이 없는 사회보험 중심으로 복지시스템을 구축한 것이다. 동시에 미국적 합리성(자유롭고 공정한 경쟁, 공평무사한 사법권, 소비자 주권, 창의성 보장, 민주적 통제 등)이 없는 상황에서 미국 특유의 강한 자본권과 국가의 최소개입주의 시스템을 구축한 것이다. 문제는 대기업과 공공부문 등 좋은 직장 중심으로 구축된 사회보험 시스템이 경제발전에 따라 조만간 중소기업으로 내려 갈 수 있고, 자영업자는 임근근로자로 흡수된다는 낙관적 기대가 무너졌음에도 불구하고 일자리, 복지, 공정거래 시스템 등은 기존의 관성대로 굴러가게 방치한 것일 것이다. 그 결과가 3비층과 하청중소기업으로 대표되는 비기득권자들이 강한 노동과 무소불위의 자본의 샌드위치로 되어버린 현실이다. 이는 한국의 지식사회와 공공리더십이 대한민국의 저변에 면면히 흐르는 봉건성과 식민성, 분단과 냉전의 유산, 발전국가의 유산, 지경학적 제약 조건(중국 인접)을 직시하지 못한 것과 관련이 있다.

전반적으로 박정희 시대에는 어쨌든 나름대로의 국가 발전 전략에 따른 지대(진입장벽, 특혜) 할당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있다. 그러나 지금은 정치(선출 권력)의 무능을 틈탄 관료집단과 사익집단의 힘에 의한 지대 수취 행위가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다. 그 결과 한국 사회는 힘 있는 존재가 똬리를 튼 곳에서는 시장원리가 너무 통하지 않고, 힘없는 존재들(건설노가다, 식당아줌마, 영세중소기업 노동시장 등)이 사는 곳에는 너무 가혹한 시장원리가 흐르게 되었다. 그래서 오른쪽으로도 확 굽어지고 왼쪽으로도 꽤 굽어진 이중 왜곡 사회가 되어 버린 것이다. 우파적 가치(자본권 보호, 사적소유권, 자유 선택권, 과소규제, 경쟁)의 과잉과 좌파적 가치(노동권 보호, 경쟁배제, 과잉규제)의 과잉이 동시에 나타나게 된 것이다. 당연히 좌파적 개혁과 우파적 개혁의 결합 병진이 필요하다.

이와 동시에 진보든 보수든 지난 20~30년 동안 끊임없이 힘을 키워 온 금융시장, 상품시장, 노동시장, 교육시장, 부동산 시장, 의료시장, 복지 시장 등을 제어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시장의 상거래나 사람의 자유로운 행위에 대해 개입 시점, 지점, 수준을 정확히 설정하여 공공적 의도와 실제 결과를 근접시키는 행위는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반신자유주의 이념으로도, 줄푸세 이념으로도 일도양단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이념의 문제도 , 순수하게 기술적인 문제도 아니기에, 일종의 정치/정책 종합예술이 되어버렸다고 할 수있다. 노무현 정부도 이명박 정부도 큰 현안으로 된 금융시장(신용카드 대란, 가계부채, 저축은행 사태), 부동산 시장(아파트값, 전세값), 노동 시장(고용률, 비정규직), 교육 시장(사교육비, 등록금 등)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였다. 문제는 이들보다 확실히 잘 할 수 있다고 장담하는 사람은 복잡다단한 현실과 정치/정책을 너무 모르는 사람 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강남 개발 vs 용산 개발

지금은 국가 권력으로 통제하기 곤란하거나, 세련되게 제어(규제, 촉진)하지 않으면 안 될 힘(시장)들이 많이 생겨났다. 특히 경제사회 주체들의 자율성이 큰 폭으로 신장되었고, 이들 상호간의 연관/연계성이 매우 높아졌다. 이제는 경제(금융)의 글로벌화와 시장화로 인해 사적 소유권을 부정하는 8.3조치 같은 것은 언감생심이 되었다. 1997년 외환위기와 2000년대 중반의 부동산 대란에서 보듯이 금리, 환율에 대한 국가의 영향력도 아주 제한적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 무역(통상) 정책과 조세(특히 법인세) 정책도 마찬가지다. 재벌, 토건족, 언론, 노조, 대학, 종교집단, 사학재단, 각종 직능협회, 시민사회단체에 대한 통제력도 마찬가지다. 입법부도 더 이상 통법부가 아니며, 사법권력도 더 이상 권력자의 시녀가 아니게 되었다. 하지만 이들이 국가와 사회의 중장기적 이익을 추구하는 공적 존재로 바뀐 것은 아니다.

지금 민생과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각종 모순부조리; 경제(재벌, 금융) 문제, 일자리 문제, 노동, 교육, 조세재정, 복지, 부동산, 소비자 물가(유류, 통신, 식료품), 사법, 관료마피아, 언론, 과도한 지대 문제 뒤에는 예외 없이 정치권력으로 어찌하기 힘든 강력한 이해관계자(비선출 권력)들이 버티고 있다. 그런데 이 강고한 모순부조리를 정교하고도 끈질기게 제어(제압)할 정치, 특히 선출권력은 너무나 약하다. 특히 정당이 약하고, 선거제도가 후진적이다. 또한 정치와 연계된 언론, 전문가(지식사회), 시민운동도 약하다.

그런 점에서 개혁을 도시개발에 비유하면 박정희는 무소불위의 권능을 가지고 1960년대 허허벌판이던 강남을 개발한 격이다. 김대중은 외환위기라는 대화재로 도시의 상당부분이 불타 버린 탄 구도심을 재개발한 격이다. 그러나 노무현, 이명박, 2012년에 선출할 대통령, 그 이후에 선출할 대통령들은 상주인구가 많은 좁은 구도심을 재개발하는 격이라고 할 수 있다. 구도심 재개발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용산참사를 보면 알 것이다. 용적률은 함부로 올릴 수가 없다. 도로, 공원 등 도시인프라 공급도 제한되어 있다. 구도심은 이해관계자들도 많을 뿐만 아니라, 하나 같이 과도한 보상을 요구한다. 이해관계자간 다툼도 치열하다. 투기꾼, 위장전입자, 알박기가 왜 없겠는가? 당연히 여기서 내몰리면 대책 없는 서민들 또한 얼마나 많겠는가? 하지만 공공재원도 개발 이익도 얼마 되지 않으니 쓸 수 있는 지렛대가 마땅찮다. 박정희 시대에는 개발이익도 컸고, 수틀리면 공권력을 동원하고, 그도 안 되면 깡패라도 동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지금도 앞으로도 불가능하다. 국가가 손을 완전히 놔버리거나, 공권력이나 공공재정을 사용하는데 극히 인색하면 재개발=개혁은 거의 진행되지 않는다. 이는 참여정부의 얘기이자, 향후 출범할 진보 정부의 얘기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국가가 박정희 시대의 추진력을 꿈꾸며 손발을 거칠게 놀리면 ‘용산참사’가 일어난다. 바로 이 때문에 민심의 좌우 요동이 일어난다고 보아야 한다. 국민들의 눈에는 주류 정치 세력이 하나 같이 미덥지 못하다는 얘기다.

專 우위, 紅의 환골탈태

사실 20~30년 전에는 자본주의-시장경제 체제를 타도하면, 모든 빈곤, 불안, 극심한 경쟁, 사회통합, 범죄 등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었다. 1960년대 중국에서는 모택동 사상 하나면 중국 사회의 물질적 문화적 생산력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 국가 공인 사상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중국의 개혁개방은 紅(좌파적 이념, 모택동 사상)과 專(전문지식 기술) 사이에서 전의 우위를 확립하고, 홍에 대해서도 그 합리적 핵심을 모택동-화국봉과 전혀 다르게 해석한 등소평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런데 한국 진보와 보수의 주류는 여전히 홍(이념) 한칼로 우리 사회의 대부분의 모순부조리를 일도양단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진보가 기대하는 홍은 대체로 민주화, 탈권위, 도덕적 신뢰, 분권, 자율, 언론의 정상화, 총선, 대선 승리 등이다. 지금은 신자유주의 반대와 보편적 복지가 그 뒤를 잇고 있다. 보수는 줄푸세와 경제성장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한국 사회의 문제를 파고 들어가 보면 이런 회심의 한칼로 정리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반신자유주의 운운하는 한국 진보는 모택동이 후계자로 지목한 화국봉 수준인지도 모른다. 전해들은 얘긴데 화국봉은 2008년에 87세로 사망하면서 자본주의의 포로가 된 중국 공산당의 주류 노선에 반발하여 그 유산을 중국에서 상당히 좌파적 전통이 깊은 한 공회(노조)에 기부했다고 한다.

지금 한국 사회는 보수건 진보건 홍(이념)보다 전(국가경영 역량)이 압도적으로 중요하다. 물론 전은 똑똑한 지도자나 그럴듯한 가설을 가진 전문가들만 의미하지 않는다. 국가경영은 다양한 층위, 다양한 부문의 수많은 전문가(정치인, 관료, 학자, 활동가 등)들의 입체적이고 통일적인 정치, 정책 행위를 통해서 이뤄지기에 이념정책을 공유하고 상호 신뢰도 있는 인적 네트워크가 결정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단기적이고 협소한 이익을 추구하는 이익집단을 제압할 수 있는 깨어있는 시민들의 조직(시민운동체)도 필수불가결하다.
한국 진보와 보수는 전의 우위 뿐 아니라 (“흑묘백묘론”식으로) 홍의 환골탈태 수준의 재해석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제시한 홍의 하나가 바로 공평, 즉 합리적 불평등이다. 사회적 상벌체계의 합리화다. 이는 인적 물적 자원의 흐름을 원활하게 하여 경제사회적 활력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산업차원의 동일노동 동일임금론과 철지난 각종 특권특혜의 재조정론, 정당과 선거제도 합리화 관건론 등이다. 하지만 나는 이 한칼로 한국 사회의 대부분의 모순부조리를 해결할 수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이 칼 없이는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그리 많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흔히 내 생각의 정수를 공평론(사회적 상벌체계 중시론)으로 정리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나는 그 못지않게 이 시대 한국은 환경과 과거 빛나는 성공신화를 가져온 낡은 시스템의 충돌이 격렬한데, 한국 공공이 이를 정확히 인지하지도 해결하지도 못하고 있다는 것,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진보가 고수하던 홍의 환골탈태와 전의 우위를 주창한 것이 아닌가한다.

오연호와 486의 총체적 혼미

오연호는 <진보집권 플랜>에서 이렇게 말했다. “왜 진보개혁 진영이 이명박에게 정권을 빼앗겼는지, 다시 정권을 찾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어떤 분야의 질문을 받아도 ‘아하, 그렇구나’하는 반응이 나올 정도로 예리한 답을 해줬다. (조국교수는) 준비된 시각, 준비된 콘텐츠를 가지고 있었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한계를 지적하면서도 왜 그런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었는지 애정을 가지고 조명했다.(p 323)

과연 그런가? 오연호가 정말로 이렇게 생각한다면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다.

조국 교수는 선진국이 어떻게 사는 지를 잘 몰라서 정치적(진보적) 상상력이 빈곤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지금 옆으로 보지 못하도록 시야가 가려진 채 마차를 끄는 말과 같은 상태......우리나라와 경제력이 비슷한 나라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와 다른 삶의 방식을 봐야 이것을 우리나라에서 어떻게 실현할 것인지 생각할 것 아닙니까?(p 144)

과연 그런가? 우리 국민들이 선진국을 모르는 것이 문제인가? 한국 지식사회가 바닥현실과 속살을 몰라서 문제인가? 진보적 상상력의 빈곤이 문제인가? 종합적, 균형적 이해에 기초한 통찰력의 빈곤이 문제인가?

조국 교수는 386 세대는 진보적 상상력이 빈곤하고, 어느새 관리자 모드로 가 버렸다고 한다. 각 정당들이 연대와 연합에 신경 쓰지 않는 것은 진보의 정치/사회 지도자들이 왕이 되기를 포기하고 소영주 생활에 만족해버려서 문제라고 한다. 그래서 386세대에게 새롭게 뭔가를 해보자고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심정으로 책을 썼다고 한다.

과연 그런가? 그러나 내가 볼 때는 진보의 정치/사회 지도자들은 소영주 생활에 만족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똥이나 돌을 들고 있으면서도, 금이나 동을 들고 있다고 생각하고, 민주당과 몸을 섞으면 자신이 든 금이나 동(진보적 정체성)이 훼손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앞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돌아서서는 자신의 이념정책과 조직이 대중에게 더 많이 노출되면 지지세가 더 붙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지세가 감소한다고 생각하는 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는 일종의 편향이 강한 신도들만 모아서 밀실에서만 생존 가능한 사교집단의 교주다. 나는 대중에게, 또 깨어있는 시민에게 자신의 이념과 정책을 설파하면 다수가 된다고 확신하는 정치세력이라면 통합에 적극적이고, 국민참여 경선에 적극적이고, 무엇보다도 당내 공정한 경쟁을 최우선 가치로 생각할 것 같다. 오직 두려워하는 것은 지령에 의해 움직이는 소수 political machine(대의원)들이 판치는 경선이다. 스스로 이념정책, 인격, 능력에 자신이 있다면 통합에 적극적이지 않을 이유가 없다. 나는 광장에 나가 열심히 이념, 정책, 인격, 능력을 5년이고 10년이고 설파해도 다수가 안 되면, 소수파로서 만족하고 나름대로 존재의의를 찾든지, 아니면 내가 틀린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념정책을 교정하든지, 그도 아니면 오류를 인정하고 사라지는 것이 역사 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런 자세가 진정으로 진보적이라고 생각한다.

조국 교수는 자신이 받은 지적, 이념적 특혜를 다른 사람과 나누고 싶어서 이 책을 썼다고 했다. 그러나 다시금 느끼지만 한국 사회는 바닥현실이나 속살이 특이해서 바닥을 기어 본 사람, 실물을 만져 보지 않은 사람은 사회를 잘 모른다. 그런 점에서 조국 교수는 물질적, 문화적, 권위 측면에서 특혜를 받았는지는 모르지만 지적, 이념적 특혜는 받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 특혜는 좌절하고 바닥을 기어보고 실물을 만지고 있는 사람들이 받지 않았나 싶다.

정말 오연호 대표는 조국 교수의 경험, 네트워크, 지적 역량에 비해 너무 많은 것을 물었다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조국은 자신이 잘 모르는 분야에 대해서 깊은 연구나 그 분야 전문가들과 풍부한 소통 없이 너무 많은 발언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많은 정책담론이 포함된 진보 집권 전략을 말했는데, 책 표지의 추천인(소설가 공지영, 외과의사 박경철, 만화가 강풀, 청년유니온 위원장 김영경) 중에 그 담론의 핵심 소비자인 정치인도 없고, 경청할만한 검증자인 청와대 정책 브레인의 이름이 하나도 없다는 것도 여간 이상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책 표지에는 조국이 책에서 “번개처럼 껍질을 쪼개고, 천둥처럼 본질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조국은 자신이 “차분하게 사태를 진단하고 냉정하게 대처법을 정리하는데 능했다”고한다.

과연 그런가?

내가 볼 때 <진보집권 플랜>은 조국과 오연호 등 진화를 제대로 못한 386의 혼미의 기념비다. 그래서 이 책을 비판적으로 정독하는 사람에게 미래가 있다고 확신한다. 조국 현상은 본질적으로 2002년의 정몽준, 2007년의 문국현 돌풍과 뿌리는 같다. 뭔가 주류적, 전통적 방식(인물)이 아닌 다른 방식(인물)으로 답답한 현실(교착 상태)을 돌파 해 봤으면 하는 열망이다. ‘정치 로또’심리의 발로라고 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니다. 다만 정몽준, 문국현 현상과 조국 현상이 다른 것은 정몽준, 문국현은 스스로가 ‘백마 타고 온 초인’이라고 설쳐댔지만, 조국은 조용히 자신의 소신과 견해를 얘기 했을 뿐이다. 조금도 나댄 적이 없고, 오히려 손사래 친 적이 많다고 알고 있다. 그러므로 조국 현상은 조국의 책임이라기보다는 언론과 새로운 돌파구를 염원하는 대중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는 선거나 공직이나 시민사회 단체 활동이나 연구 활동을 통해서 검증을 받아 온 기존의 권위가 별로 인정받지 못하는 한국 현실의 반영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국 현상은 낮은 복지 수준과 만연한 불의처럼, 2만 불대 나라에 어울리지 않는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희망을 열심히 찾되 기본을 망각하고,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엉뚱한데에다가 머리를 박는 대한민국의 슬픈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문화적 해악

조국 교수는 아무래도 진보의 정치(정책)적 지도자라기보다는 어떤 관념과 문화(풍조)의 전파자이다. 따라서 그 잘못도 그가 전파하는 관념과 문화에서 찾아야 한다. 정치(정책) 노선에 대한 목소리 큰 제언자로서의 오류도 여간 심각한 것이 아니지만 이는 둘째다. 조국 교수가 전파하는 나쁜 문화(풍조)의 핵심은 한마디로 자신이 잘 모르고, 깊이 연구한 적도 없고, 그 분야 전문가들과 지적 교류도 별로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진보와 대한민국의 운명에 중차대한 영향을 줄 수도 있는 발언을 너무 주저함없이 한다는 것이다. 물론 정치나 정책 현안은 일반 대중이 그 의미와 한계를 가장 잘 아는 경우가 많다. 다수 대중의 판단이 곧 법으로 되는 것이 민주주의의 핵심 아닌가! 그래서 투표도 하고, 여론 조사도 하고, 대중의 정치참여를 권장하는 것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문가의 판단과 의견이 존중 되어야 할 영역은 분명히 있다. 그런데 조국 교수는 대중의 영역과 전문가의 영역을 너무 자유로이, 주저함 없이 넘나들었다. 깊은 연구가 없었으니 그 분야의 고민(논쟁) 지점이나 지적 지형(한계)을 모르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철지난 권위(서울법대 교수)에 기대어, 자신이 뭘 모르는지도 모르고, 너무 많은 얕은 진단과 엉뚱한 대안을 쏟아내는 것이 이상한 일이다. 이는 꼭 고쳐져야 할 지식사회의 문화(풍조)다.

또 하나의 나쁜 문화는 진보가 근본 문제, 즉 ‘진보가 도대체 뭔지? 진보가 파는 비전과 정책이 정말로 노동자와 취약계층과 서민중산층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지’를 더 깊이 성찰해야 할 시점에, 가설정당(무지개연대)이나 드림팀 뽑기 놀이 등 정치공학으로 대중의 관심이 쏠리게 한 것이다. 나는 아무리 흥행이 중요하다 하더라도, 장관으로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정책 현안 관련 이해관계자가 누구이고, 좋은 의도를 무참히 배신하는 독특한 한국의 독특한 정책 환경에 대해서 고민을 거의 안 해 본 유명 진보 스타들을 장관 감으로 상정하여 투표하는 이벤트를 연출해서 얻을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정말 드림팀 뽑기 놀이는 지금 걸음마 단계의 ‘정책 매니페스토’ 운동(문화)이나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 등이 연출하는 참신한 시민운동이 창조하는 문화와 비교해 보면 얼마나 퇴행적인 것인지 알 수 있다. 이런 얄팍하고 후진적인 지식사회의 문화가 한국 사회를 얼마나 부박하게 만들고, 나아가 진보 동네의 이념 정책적 수준을 얼마나 떨어뜨렸는지는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나는 조국 교수가 진보의 근본 문제를 집요하게 물었다면 진심으로 찬사와 존경을 보냈을 것이다.

바위에 새긴 신념

40대 중반 이후, 바위에 새긴 거대한 글씨처럼 선명하게 각인된 신념은 진보가 집권에 성큼 다가서려면 지식사회의 문화(풍토)적 혁신과 이념정책적 혁신이 그 선봉에 서야 한다는 것이다. 동시에 최소 3회 이상 연속 집권이 가능한 진보정권이라는 예쁜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진보의 줄기, 뿌리가 튼튼하고, 토양과 생태계가 건강해야 한다는 인식이 진보동네에 확고히 뿌리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보수에게도 해당 될 것이다.

정말 모든 영역에서 빛나는 성공신화를 가진 강력한 이익집단이 똬리를 튼 거대하고 복잡한 대한민국을 획기적으로 뜯어고치기 위해서는 진보든 보수든 그 진영의 이념정책적, 조직적, 문화적, 인적(리더십) 수준의 총체적 향상이 필수불가결하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서는 진보든 보수든 각 진영에 크고 작은 이념정책 공동체가 형성되어 이들이 상호경쟁하면서 칡넝쿨처럼 얽히고 설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스타 정치인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역할은 너무나 제한적이다. 정당은 그 보다 훨씬 중요하지만 역시 그 권능은 제한적이다. 현대전이 육해공군의 유기적 협조가 기본 이듯이, 한국 사회를 제대로 개혁하기 위해서는 이념과 정책을 공유하며 조직 문화도 선진적인 정치인, 관료, 언론인, 전문가/지식인, 활동가들의 수준의 전반적인 향상과 상호간의 유기적인 협력이 필수적이다. 물론 한나라당에 이를 가는 대중들에게 일시적인 심리적 쾌감만 맛보게 하려면 스타정치인의 대통령 당선 하나면 족할 것이다. 이념정책공동체도 필요 없고, 강하고 유능한 정당도 필요 없고, 진영의 총체적 실력 향상도 필요 없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되면 몇 년 뒤 진보 진영은 콩가루 집안이 되고, 전임 정권들처럼 총체적 무능 낙인을 받아 조소와 지탄을 받으면 퇴장할 것이다. 그래서야 되겠는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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